
버스정류장 저만치 떨어진 길섶에서 발을 멈춘다. 소국도 아닌 것이 낭창낭창 긴 목, 간드러진 가을꽃. 눈을 뺏기고 마음을 뺏기고 살폈더니 왕고들빼기. 겨우 고들빼기 주제에 부잣집 고명딸처럼 도도하게 꽃이 필 줄이야.
아, 그러고 보니 가을꽃이 되려고 너희는 여기 숨어 살았구나. 있거나 말거나 잡풀인 줄만 알았지. 봄내 여름내 아무도 모르고 지나다녔네. 버스를 기다리고 벤치에 앉아 긴 전화를 걸었으면서 아무도 몰랐네. 알았으면 하루에도 열댓 번은 지나갔을 저기 밥집 아주머니가 가만뒀을 리 없지. 푸른물 보드랍던 봄순일 적에 죄다 데려갔을 거야. 데려가서는 소금물 찰찰 뿌려 밥도둑 봄김치로 담그고 말았을 테지. 우우 몰려온 민들레한테도 조용히 꽃을 피우자고 신신당부를 했겠구나.
내 이름으로 두어 평 꽃밭이 있으면. 숨어 피는 이 풀꽃들이나 미어터지게 심어 볼까. 왕고들빼기꽃이라고 구월이면 크게 이름표를 달아 주고 마음대로 흔들리라고 크게 바람길을 내 주고.
길가에 서서 풋잠 같은 꿈을 꾸다 올려본 하늘. 움푹움푹 깊어갈 일만 남은 이 가을.
2025-09-1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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