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부터 8일까지 17·18코스에서 열린 2025 제주올레걷기축제 참가자들이 길을 걷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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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부터 8일까지 17·18코스에서 열린 2025 제주올레걷기축제 참가자들이 길을 걷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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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주차장에서 둘째날 걷기행사에 앞서 올레꾼이 이색분장을 올레 행사요원과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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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주차장에서 둘째날 걷기행사에 앞서 올레꾼이 이색분장을 올레 행사요원과 사진을 찍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길, 제주올레는 사람이 사람한테 가는 길인 것 같아요.”
경기도 여주 여강길 회원 30여명을 이끌고 온 한경곤(69) 현장팀장은 지난 7일 제주올레 17코스를 걸으며 이렇게 말했다.
강을 따라 여주를 관통하는 140㎞의 여강길도 제주를 바다로 잇는 올레길도 결국 “사람을 만난다는 점은 똑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6~8일 개최한 ‘2025 제주올레걷기축제(Jeju Olle Walking Festival)’에는 국내외 1만여 명의 참가자가 몰렸다. 첫날 17코스에 이어 둘째 날은 17코스 후반부와 18코스를 잇는 ‘도심·바당(바다) 올레’가 이어졌다.
7일 오전 8시, 이호해변 행사장에는 이른 시간부터 1000여 명이 모여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게임을 즐기며 발걸음을 풀고 있었다. 파란 가을하늘의 몽실구름은 마치 참가자들의 보폭을 맞추기라도 하듯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얼굴에 간세다리 페인팅을 하고 걷는 뚜벅이들의 표정은 잉크빛 바다보다 더 맑았다.
길은 자연과 생활 풍경이 뒤섞여 단조로울 틈을 주지 않았다.
도두항 ‘추억애(愛)거리’에서 펼쳐진 전통놀이, 무지개해안도로 인근에서의 단체사진 촬영, 동한두기길 해안도로의 생동감 넘치는 벽화 속 물고기들은 마치 바다를 뛰쳐나와 벽을 타고 오르는 듯했다. 올레길을 ‘관광 동선’이 아닌 ‘생활권의 확장’으로 보이게 했다.
#추억을 걷는 길, 사람에게 향하는 길, 정을 만나는 길,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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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17코스에서 만나는 용담해안도로, 동한두기 벽화, 관덕정 옆 시골동네슈퍼, 추억의 잡지들이 창문에 붙어있는 가게, 건입동 벽화마을의 풍경.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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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부터 17코스에서 만나는 용담해안도로, 동한두기 벽화, 관덕정 옆 시골동네슈퍼, 추억의 잡지들이 창문에 붙어있는 가게, 건입동 벽화마을의 풍경. 제주 강동삼 기자
길은 추억속을 거닐게 한다. 관덕정 인근 골목길에서는 수산물시장 동네슈퍼라는 간판 앞에는 겨울점퍼 1만원, 티 3000원이라는 붙여진 제주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보세옷 가게도 만난다. ‘선데이서울’도 아닌 ‘선데이제주’라는 옛 잡지 표지, 일본 만화가 창문에 옛스럽게 붙은 상점이 참가자들의 발길을 잡았다. 자동차로 스쳐 지나가면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다. 걸어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거기에 있었다. 올레길 완주자들이 “매년 같은 길을 걷는데도 다른 길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인천에서 온 완주자클럽 회원 송안나(50대) 씨는 “21코스 지미봉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하자 뒤따르던 또 다른 완주자 허관철(60대 후반) 씨는 “7코스가 더 환상”이라며 장난스레 응수한다.
걷기의 묘미는 작은 풍경을 다시 발견하는 데 있기도 하다. 건입동 벽화마을에서는 아이들이 벽에 그려진 ‘영등할망’ 아래서 폴짝거리며 바다로 날리는 연을 따라가고, 백록담흰사슴을 만나는 순간, 멀리 제주항은 수채화처럼 번진다.
올레길에선 사람을 만나기도 하지만 정을 만나기도 한다. 사라봉 정상 팔각정에서 만난 한 여성은 처음 본 취재진에게 감귤 하나를 내밀었다. 낯선 정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우연찮게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잠시 쉬던 벤치에서 선글라스를 두고 일어서던 한 어르신에게 “안경 챙기셔야죠”라고 말을 건넨 게 인연이 돼 길동무가 됐다. 오수태(80) 씨는 공직에 몸담고 있다가 서귀포 신시가지에서 9년을 살았고 제주올레를 여러 차례 완주했으며, ‘가슴으로 걷는 올레 900리’(개정판 제주올레 완주기)라는 책까지 펴낸 ‘올레 철학자’였다.
#느리게 걷자고 말을 건네는 간세다리… 제주올레길에선 모두가 철학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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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업은 돌로 향하는 제주올레꾼들이 별도봉 언덕을 오르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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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업은 돌로 향하는 제주올레꾼들이 별도봉 언덕을 오르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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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별도봉을 지나 화북포구로 향하는 제주올레걷기축제 참가자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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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별도봉을 지나 화북포구로 향하는 제주올레걷기축제 참가자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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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상흔이 서린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마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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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상흔이 서린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마을. 제주 강동삼 기자
올레길에선 모두가 철학자가 된다. 길이 지쳐갈때쯤 만나는 ‘간세(느릿느릿한 게으름뱅이란 뜻의 제주어)’ 표지판이 사유하는 철학자가 되도록 만들어준다. 느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느끼도록 안내해주는 길이다.
홀로 걷는길, 햇살이 주는 태양에 감사하고 벗이 되어 주는 구름에 고마워하며 걷던 시간을 뒤로 하고 싶어지던 찰나에 만난 길동무는 그래서 더욱 반가운 존재다. 때마침 ‘나와 나 사이의 빈 공간’에서 놀던 시간이, 그 홀로 걷는 좀 쓸쓸하고 심심한 시간과 작별하고 싶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오 씨는 1970년대 제주의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풀어놨다. “1976년인가. 갑자기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맙시다’라며 방송하던 시절도 있었다”며 “성이시돌목장이 관광지로 처음 알려지고 신혼부부들이 프로펠러 비행기 타고 처음 제주로 들어오던 때였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는 아기업은 돌이 있는 별도봉을 지나면서 아마도 추억 속으로 걸어가는 듯 했다. 그렇게 제주올레는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기도 했다.
특히 올레길을 걸으면 4·3의 상흔을 마주하게 된다. 화북포구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1949년 국방경비대가 3개 마을 67가구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학살한 자리, 지금은 돌담 일부만 남아 당시의 비극을 말없이 전한다.
조기수 제주올레 브랜드총괄실 홍보팀장은 “규슈·미야기 올레에서만 20여 명이, 몽골올레에서도 첫 참가자가 올 정도로 올레 문화는 이미 국제적”이라며 “걷기를 통해 지역과 세계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공식 집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주최측은 약 1만여명이 걷기축제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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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주올레걷기축제 마지막 날 8일 조천에서 신촌방향 역방향으로 걷는 올레꾼들의 만나는 제주올레 풍경들.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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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주올레걷기축제 마지막 날 8일 조천에서 신촌방향 역방향으로 걷는 올레꾼들의 만나는 제주올레 풍경들. 제주 강동삼 기자
한편 축제 마지막 날인 8일에는 조천만세동산에서 화북포구까지 이어지는 18코스 역방향 걷기가 진행됐다. 용천수 23곳을 지나는 재미와 함께 어촌의 한가로운 풍경에 흠뻑 취하는 시간이어서 지친 3일을 위로해준다.
글 사진 제주 강동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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