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 타고 넘어가 만세 대열 합류’…3·1 운동 이끈 여성들

‘담 타고 넘어가 만세 대열 합류’…3·1 운동 이끈 여성들

입력 2016-02-28 10:41
업데이트 2016-02-2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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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등 신교육 받은 여학생 적극 참여…여성 사회활동 확산 계기

“파리평화회의 회원 여러분이 바야흐로 인류의 정의와 권리를 바르게 고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에, 우리 한국 어린 소녀들도 삼가 하느님 앞에서 정성을 다하여, 여러분이 보살펴 주고 편안하게 해주기를 요청합니다.

우리는 불행히도 여자의 몸으로서 수치스러운 대우를 받으며 갖은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향해 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어디를 향해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의 저작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수록된 ‘여학생이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글’이다.

작성자는 명시되지 않았다. 1919년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항일의식에 고취된 여학생들이 1차대전 종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던 국제사회에 일제의 폭정을 알리고자 쓴 글로 추정된다.

구한말 기독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서양인이 국내에 여학교를 잇달아 세우면서 이래저래 핍박받던 여성들도 신교육을 경험했다.

이렇게 배출된 ‘지식인 여성’들은 1919년 전국에서 일제히 폭발한 항일 독립운동의 당당한 주체였다. 이화학당에 재학하던 유관순(柳寬順, 1902∼1920) 열사도 그 중 한 명이다.

◇ 남성 중심 봉건 잔재 벗어던지게 한 3·1운동

이화여대가 1967년 펴낸 학교 역사책 ‘이화80년사’의 한 대목에는 3·1운동 당시 여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사실의 역사적 의미가 담겼다.

“여필종부(女必從夫,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뜻을 따라야 한다)니 삼종지도(三從之道, 여성은 어릴 때는 부모를, 결혼하면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세 가지 도리)니 하는 낡아빠진 봉건 제도가 조국 비상사태에 임해 배운 여성들을 안방구석에 묶어놓을 힘이 없도록 시대는 변하고 사태는 급격했던 것이다.”

책에 따르면 이화학당 학생들은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오후 3시가 되면 일제히 공부를 접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를 열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화학당 학생들도 당일 시위에 동참하기로 전날 뜻을 모았다. 학교 측은 당일 학생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수위와 교사들이 곳곳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일부 학생이 담까지 타고 넘는 열의로 끝내 학교를 빠져나가 만세 대열에 합류했다.

3·1운동을 계기로 불붙은 여성 사회활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확산했다.

이화학당 졸업생으로 뒷날 승려가 된 김일엽(金一葉, 본명 김원주, 1896∼1971)은 1920년 여성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 논설에서 남녀평등권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이화학당 졸업생 등은 3·1운동 이후 국내는 물론 중국과 미국 등 외국에서 각종 부인회를 조직, 항일정신을 높이는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체포돼 옥살이한 여성도 많았다.

‘이화80년사’는 “여성이 집안에 갇혀 있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당시 신교육을 받은 지식 여성이 항일투쟁에 앞장선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신교육은 크게 보면 조국 독립운동 때 이미 첫 결실을 봤던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은식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여성과 아동의 애국 열기를 별도로 소개할 만큼 중요하게 다뤘다. 책에는 ‘마리(馬利)’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법정에서 일본인 재판관과 한 문답도 기록됐다.

“너는 어째서 남자처럼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는가”라는 재판관의 물음에 이 학생은 “세상 모든 일의 성공은 모두 남녀가 공동으로 하는 데서 이뤄지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반드시 부부가 함께 만들고, 좋은 국가도 남녀의 협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너는 일한 합병과 일본 정부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는 “한국은 일본에 합병되기를 결코 응하지 않았으며, 당신 정부가 한국을 다스리는 정책도 전혀 공도(公道)에 의하지 않았다. 진정 독일이 그 속국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신랄하게 일본을 비판했다.

◇ 신교육 받고 독립에 몸바친 여학생 유관순

유관순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3·1 만세운동에 투신한 대표적 인물이다. 충남 천안 출신인 그는 14세 때 이화학당에 편입했다가 1919년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17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숨졌다.

선비 집안 출신인 유관순은 이화학당에 다닐 때도 희생정신과 봉사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힘든 청소를 도맡아 하는가 하면 형편이 어려운 친구의 식비를 대신 내주고 자신은 굶을 만큼 배려심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3·1운동 당일 이른바 ‘담치기’로 학교를 빠져나가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부른 학생 가운데는 유관순도 포함됐다.

같은 달 10일 조선총독부가 임시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도 다른 학생들처럼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직 고향에서 만세운동이 없다는 말을 들은 그는 어린 나이에도 일본 경찰 눈을 피해 만세운동 조직화에 앞장섰다.

그해 4월 1일(음력 3월 1일), 유관순은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경의 칼에 부모를 잃고 투옥됐다. 모진 고문에도 동지의 이름은 대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계속 만세를 부르다 고문당하기를 반복했다.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유관순에게 일본 경찰은 쇳가루와 모래가 섞인 밥을 줬다고 ‘이화80년사’는 전한다. 결국 유관순은 1920년 10월12일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참고문헌: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소명출판), 이화여대 ‘이화80년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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