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100억건 분석 결과, 상대방에 대한 혐오와 비하 일상화
“‘맘충’ 소리 듣는 한국에선 결혼하고 육아하고 싶지 않다”(트위터 사용자 @mnb****)“이젠 지나가는 ‘한남충’이 날 죽일지 안 죽일지 걱정해야 한다니”(트위터 사용자 @S2****)
한국 사회에 ‘벌레’가 들끓고 있다.
맘충은 ‘자신의 아이만 아는 몰지각한 엄마’를, 한남충은 ‘가부장적이고 여성을 배려할 줄 모르는 한국 남성’을 뜻한다.
모두 멀쩡한 단어에 벌레라는 의미의 충(蟲)을 붙여 대상에 혐오를 드러낸 신조어다. 이런 ‘○○충’이란 단어들이 인터넷 공간을 뒤덮으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30일 빅데이터 기반 인공지능 전문기업 다음소프트가 2011년 1월 1일∼2016년 5월 26일까지 블로그 7억2천25만3천521건과 트위터 92억4천959만7천843건을 분석한 결과 ‘○○충’이란 신조어가 빠른 속도로 확산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충’은 대부분 대상에 대한 비하와 경멸의 의미로 쓰인다. 언어에 사용자의 의식이 투영되는 만큼, 한국 사회가 혐오로 ‘벌레’먹고 있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우리 사회가 앓는 병으로 규정하고, 시급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한남충·맘충 성대결뿐 아니라 일상 모두가 ‘○○충’
‘○○충’이란 단어의 시작은 ‘일베충’이다. 극우성향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 회원을 일컫는 이 단어는 일베 회원들에 대한 비하를 담아 쓰인다.
일베충은 2011년 하반기 처음 등장해 현재까지 총 85만7천750회가 언급됐다. 올해만 벌써 15만회를 넘겼다. 그만큼 일베의 존재에 반감을 갖는 이가 늘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남자’와 ‘벌레’가 합쳐진 신조어 ‘한남충’도 같은 기간 24만796회나 등장했다. 한남충이란 단어 자체는 2015년 8월 처음으로 등장했지만, 올해는 일베충을 뛰어넘어 18만951회나 입에 오르내렸다. 이는 ‘김치녀’·‘된장녀’·‘김여사’ 등 온라인에서 벌어진 여성 비하에 대한 여성들의 집단 반발이란 해석이다.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그간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녀(女)’란 딱지를 붙여왔는데 이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이와 반대급부로 남성들도 ‘한남충’이란 단어에 불편함을 느끼고 스스로 자정하라는 의미에서 단어 사용이 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물론 ‘○○녀’도 ‘맘충’·‘메갈충’ 등 또 다른 여성비하 단어로 변주됐다. ‘맘충’(몰지각한 엄마)이란 신조어는 2015년 4만8천508회, 올해는 최근까지 2만1천425회 인터넷에 오르내렸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때 새로 생긴 여성주의 사이트 ‘메갈리아’ 이용자를 일컫는 ‘메갈충’도 총 6천700회 언급됐다.
특히 일베를 중심으로 한 여성혐오와 이에 대항하는 메갈리아의 남성혐오는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며 인터넷 공간을 남녀 성대결의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여성혐오는 경제난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불안의 원인이 사회 구조에 있다고 보기보다는 개별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데 집중한 탓이다.
이나영 교수는 “개인은 구조의 문제를 알 수도 없고 이에 저항하기에도 너무 나약하다”며 “특히 여성에 대한 적대감은 남성들의 집단적 망상과 분열증의 결과”라고 지적했다.
‘○○충’은 비단 남녀 혐오뿐 아니라 일상에 전방위적으로 퍼지고 있다. 사상 최악의 청년실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사회에 나가지 못하는 대학생들은 ‘학식충’(6천53회 언급)으로 불린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이 안 되니 학식만 축낸다는 경멸의 의미다.
초중고 학생은 급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급식충’(8만8천526회), 매사 진지하게 설명하려 든다는 이유로 ‘설명충’(15만7천257회)이라는 단어도 생겼다. 노인을 비하하는 ‘틀니충’(126회)이란 말도 있다.
◇ 경쟁·서열화가 낳은 병리현상…“처벌·교육 필요”
전문가들은 이같은 ‘○○충’의 폭발적 증가가 사회 병리현상에 해당한다고 본다.
‘○○충’이 붙는 대상은 대부분 여성, 노인, 유족 등 약자다. 약자보다 조금이라도 우위에 있다는 이유로 아무 죄의식 없이 비하·차별 발언을 배설하는 일이 일상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배경엔 ‘극심한 경쟁’이라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쟁이 장기화하고 서열의식이 굳어지면서, 본인의 삶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아무에게나 ‘벌레’란 혐오 표현을 쓰는 것은 개인적 일탈로 보기 어렵다”고 했다.
‘○○충’의 무분별한 언급은 법적 문제로도 비화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북부지법 형사항소2부는 인터넷 게시판 글쓴이에게 “일베충 맞네”라고 댓글을 단 회사원 김모(37)씨에게 지난 13일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 50만원을 선고유예(일정 기간 후 면소)했다.
법원은 “벌레라는 뜻의 ‘충’은 부정적 의미가 강하며, 일베 회원에게 일베충이라 지칭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판시했다.
아직 일베충 외에는 모욕·명예훼손 처벌 사례는 없다. 그러나 늘어가는 ‘○○충’ 언급량을 볼 때 처벌 사례도 폭증할 것으로 법조계에선 보고 있다.
노영희 변호사는 “‘벌레’라는 단어로 다른 사람을 비하·모욕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이라며 “‘○○충’이란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문화는 형사처벌을 통해서라도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윤태 교수는 “빠르게 변하는 기술 발전과 달리 서로 존중·협력하는 문화는 느리게 만들어진다”며 “사회 유대를 강화하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제안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