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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동생’ 안성녀의 30년 헌신, 대한민국이 잊었다

‘안중근 동생’ 안성녀의 30년 헌신, 대한민국이 잊었다

박정훈 기자
박정훈 기자
입력 2021-08-15 22:20
업데이트 2021-08-16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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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인정 못 받아 서훈조차 없어

1910년대부터 중국서 독립군 물자 지원
손자 “일제 땐 재판 넘어가야 기록 남아
증거자료 없다고 인정 못 받아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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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왼쪽 네 번째)씨는 1910년대부터 광복 즈음까지 중국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며 독립 운동을 했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안성녀오항선추모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889년 태어난 안씨는 1910년대 중국 하얼빈에서 남편과 함께 양복점을 하며 군복을 제작, 수선하고 군자금을 몰래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사진은 1951년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연합뉴스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인 안성녀(왼쪽 네 번째)씨는 1910년대부터 광복 즈음까지 중국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며 독립 운동을 했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다. 안성녀오항선추모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889년 태어난 안씨는 1910년대 중국 하얼빈에서 남편과 함께 양복점을 하며 군복을 제작, 수선하고 군자금을 몰래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사진은 1951년 안중근 의사의 차남 안준생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연합뉴스
일제강점기 치열한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안성녀씨에 대한 재평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안씨는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이다.

15일 안성녀오항선추모기념사업회에 따르면 1889년 태어난 안씨는 1910년대부터 광복 즈음까지 중국 만주 등에서 활동했다. 안씨는 1910년대 중국 하얼빈에서 남편과 함께 양복점을 차린 뒤 군복을 제작·수선하고 군자금을 몰래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안씨는 1920년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독립군이 모여 있는 북만주로 이동했다.

안씨는 그곳에서 독립군의 문서나 군자금 전달을 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다. 안씨의 증손자인 권순일 안성녀오항선추모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할머니의 거침없는 활동에 일본 군인과 경찰의 감시가 심했고, 몸에 권총을 지닌 채 딸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다”고 말했다.

광복을 맞은 안씨는 한국전쟁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했다. 살 집이 없어 관청을 찾아가 집을 부탁하기도 했다. 이후 안씨는 영도구 봉래동에서 터를 잡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1954년 별세했다. 권 사무국장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정부로부터 집이라도 받았지만, 돌아가신 이후 후손들은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해 어렵게 살았다”고 말했다.

안씨가 숨을 거둔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증거가 부족해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씨의 손자인 권혁우 사업회 명예총재는 “중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에 남은 자료가 거의 없다”면서 “중국에 있는 후손에게도 확인했으나 별다른 증거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시대 특성상 문서로 남은 자료가 없는 점 역시 걸림돌이다. 권 사무국장은 “할머니가 일본 경찰로부터 고문을 당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재판에 넘어가야 기록이 남았던 탓에 이를 증명하기 어렵다”면서 “할머니처럼 여성이거나 독립유공자의 부인인 경우 증거 자료가 없어 서훈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은데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p@seoul.co.kr
2021-08-1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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