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시민 발포 거부한 안병하 “5·18은 계엄군 과격진압이 원인”

시민 발포 거부한 안병하 “5·18은 계엄군 과격진압이 원인”

강경민 기자
입력 2018-05-10 15:15
업데이트 2018-05-10 15:15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안 치안감 유족, 10일 광주시에 고인 자필 메모·유품 기증

“(5·18민주화운동 발생 동기는)과격한 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로 시민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확대
안병하 치안감 자필 메모
안병하 치안감 자필 메모 나의갑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이 10일 5·18 기록관에서 고 안병하 치안감이 생전에 남긴 메모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5·18 당시 시민에 대한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당시 전남경찰국장) 유족이 10일 공개한 고인의 메모에서 안 치안감은 5·18이 발생한 이유를 이같이 증언했다.

그는 1980년 5월 3일 학생 시위가 시작되고, 24일 발포 명령을 거부했다며 체포될 때까지 자신이 본 광주 상황을 자필 메모로 남겼다.

이 메모를 간직해오던 유족들은 이날 광주 5·18 기록관에서 고인의 메모와 유품을 공개하고 광주시에 기증했다.

안 치안감은 5·18 발생 원인을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을 비롯해 악성 유언비어 유포, 김대중 전 대통령 구속에 따른 시민 자극 등으로 봤다.

그는 메모장에 16일까지 시위는 평온했으나 17일 자정 이후 계엄령 확대, 공수부대 투입과 진압 시작, 이에 자극받은 시민들의 무장으로 상황이 악화했다고 적었다.

또 당시 시위에 대응하는 경찰에는 ‘절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경찰 희생자가 있더라도), 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 주동자 외에는 연행치 말 것(교내에서 연행 금지), 경찰봉 사용 유의(반말, 욕설 엄금), 주동자 연행 시 지휘보고(식사 등 유의)’라고 기록했다.

계엄군 진압 후에는 ‘주동자 검거 등 중지, 군에게 인계받는 부상자 치료, 식사제공’ 등 시민들을 최대한 도울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21일 옛 전남도청에 있던 경찰 병력의 광주 외곽 철수 과정에서는 시민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며 고마운 마음도 남겼다.

‘5월 21일 도청에 있던 경찰 병력 철수하는 과정에서 데모 군중이 경찰임을 확인하고 아무 불상사가 없었으며 오히려 사복을 가져다 입히는 등 보호해줘 무사히 철수했다. ’경찰 철수 후 은행 금은방 등 강력사건을 염려했으나 시민군에 의해 강력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시민군에 의해 치안 유지됐다‘고 적었다.

그는 당시 참모 중에 지휘 책임을 지고 함께 강제 퇴직당한 간부들이 명예롭게 퇴직할 수 있게 해달라는 당부도 남겼다

연합뉴스
많이 본 뉴스
내가 바라는 국무총리는?
차기 국무총리에 대한 국민 관심이 뜨겁습니다. 차기 국무총리는 어떤 인물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통령에게 쓴 소리 할 수 있는 인물
정치적 소통 능력이 뛰어난 인물
행정적으로 가장 유능한 인물
국가 혁신을 이끌 젊은 인물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