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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콩트]《아름다운 사람들》(문학의 문학) 중에서

[김남조 콩트]《아름다운 사람들》(문학의 문학) 중에서

입력 2012-03-04 00:00
업데이트 2012-03-0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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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

희망 자활원의 원생들은 성탄절 선물로 내복 한 벌과 책 한 권씩, 그리고 과자 배급을 받았었다. 윤 군이 받은 책은 《안네의 일기》였다. 검은 머리에 검고 커다란 눈을 가진 소녀의 사진이 책의 앞표지에 나와 있었는데 동양 아이는 아니고 서양 아이 같지도 않았다. 아무튼 그 얼굴은 여섯 명이 함께 쓰는 세 평 가량의 좁은 방 한쪽에 놓인 책상 위에 있었다.







첫봄의 어느 날 밤, 소년은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내용은 유태인 대량학살에서 죽어간 한 유태인 소녀의 짧은 생애, 그 마지막 무렵을 소상히 기록한 글이었고 이로 인해 소년은 깊은 상처를 입기에 이르렀다. 이상한 구토처럼 몸속이 거북하고 눌리듯 하는 두통에다 한동안 거의 숙면을 할 수 없었다. 결코 이럴 수가 없는, 절대로 이런 일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몹시도 어둡고 비통한 글씨들로 가득 채워진 한 권의 책.

“가엾은 안네, 그렇게 넌 죽었구나.” 신음처럼 소년은 여러 번 중얼거렸다.

“죽고 말았어. 가스실에서 말이야!”

이상하고 고통스런 격정이 치받았다. 줄곧 울어대는 현악기의 줄처럼 전율하며 심신에 배어든 짙은 염색을 뽑아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는 한 권의 새 노트를 펴 놓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안네. 편지라도 써야겠는데 네가 그걸 받아 줄 사람이야. 넌 우리말을 모를 테지만, 그러나 너만이 알아듣는 얘기가 될 것 같다. 그래, 모든 말에 앞서 네가 꼭 살았어야 했다는 이 말만이 자꾸자꾸 터져 나오고 있어.”

그는 주먹으로 눈물을 몇 번 문지르곤 다음을 더 쓰려 했으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지 못했다. 한참 만에 문을 꽝하고 닫아 붙이는 심정으로 노트를 덮고 일어섰다. 그러나 며칠 후엔 또다시 뒤를 이어 글을 쓰고 있었다.

“안네. 나는 희망 자활원의 목공과에서 일하면서 밤엔 중학과정을 배우지만 사실은 두 가지가 다 마음 내키지 않아.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극비의 사실인데, 나의 정말 소원은 이소룡같이 멋있는 무술배우가 되는 일이야. 그러나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지는 전혀 몰라.”

밤이 깊어지듯이 소년의 심정도 깊어만 갔다.

“난 말이야. 네가 살아 있다면 너를 많이많이 도와주고 다시는 죽지 못하게 하고 말겠어.”

묘한 집착이었다. 안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뒤집어 놓을 수 있어야만 그 자신의 진정한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심리에 사로잡혔고, 죄 없는 그녀가 죽어간 이상 자기의 내부에도 죽음이 공존하는 듯했다.

세월이 흘러 18세가 되던 봄에 윤승욱 군은 자활원의 추천을 받아 이 목수 집의 조수로 입주하게 되었다. 이 목수는 작은 목공소를 차리고 주문받은 일거리가 끊길 땐 날품으로 목수일을 다니는 사람이었다.

작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두 개의 방이 있었다. 윗방은 이 목수 내외와 딸이 기거하고 아랫방은 제대 후 일자리를 못 잡고 있는 그 집 아들의 차지였는데 윤 군은 자연 아랫방에 얹히게 되었다. 저 애가 이 집의 딸이구나 싶은 열댓 살 난 소녀는 얼핏 보기에도 초라하고 기이했다. 시커먼 큰 눈으로 뚫어낼 듯이 사람을 응시하는데 그 시선은 사람을 거쳐 더 뒤쪽의 어딘가를 주시하는 듯했다. 윤 군의 이러한 느낌을 짐작하고 남는 이 목수는 거북한 기침에 섞어

“저 앤 기가 약한 게야. 사변 통에 그만….”

짧게 한마디를 되뇔 뿐이었다. 나중에 들었지만 사변 때 아이를 잃었다가 사흘 만에야 시체더미 옆에서 찾았는데 울지도 못하고 얼이 빠져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기가 약하다거나 아예 기가 빠졌다는 투로 그들 나름대로 진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 난리 중에 고아가 된 윤 군 자신도 양육원을 거쳐 자활원까지 옮겨진 터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집에서 숙식하게 되었고 ‘이씨 아저씨’를 따라 목수일 날품을 가거나 아니면 주문받은 일을 집에서 거들곤 했다. 이들은 집에 며칠씩 들어오지 못하는 일조차 잦았고 반대로 여러 날을 집에만 틀어박힐 때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주부만은 처신의 안정감을 유지했으며 음식 솜씨도 좋았다. 무엇보다 이 목수의 성품이 낙천적이고 온건하여 소년은 난생처음 가정의 포근함을 아는 듯했고 다만 소녀의 시선만은 부담이 되었다.

그가 돌아와 손발을 씻고 밥을 먹으러 방에 들어가면 눈길을 쏟아부으며 뚫어지게 바라본다.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은 없는데 그 부모가 ‘말도 제법 잘하는 것이 공연히 저런다.’고 핀잔을 주는 일로 미루어 더러는 지껄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 목수 부부는 소위 기가 약한 것 빼고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고 싶어 했고, 타인의 인정을 받고도 싶은 눈치였다.

“얘가 왜 이래. 실상은 멀쩡한 것이.”

이 목수는 혀를 차면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곤 했다. 이때 그의 관자놀이에서 일어나는 순간의 경련을 흘깃 보면서 소년은 오히려 그 자신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딸의 이름은 후남이었다. 이 목수의 형은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이를 부러워하던 이 목수가 두 번째로 태어난 딸아이에게 다음엔 사내 동생을 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이었다.

“후남아, 과자 주련?”

그 어머니는 자상하게 딸에게 신경을 써주곤 했다.

“자아, 이거 먹어.” 깨끗이 씻은 사과 한 알을 집어주면 활짝 웃으며 받는다. 이런 얼굴이 어디에 숨어 있었는가 싶게 청순한 미소가 주변으로 번진다. 딴 사람인 것만 같다.

“이렇게 고운 애가!” 소년은 깜짝 놀랐다. 작은 베풂에 이토록 풍요한 감격을 드러내는 일이 참으로 예뻤다. 그리고 이런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소녀의 분위기도 포근하고 부드러워짐을 알 수 있었다. 엄마를 도와 집안일도 잘하고 아침 세수 때는 삶아 빤 새 수건을 소리 없이 가져다주기도 했다.

소년은 얼마간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일을 쉬게 된 어느 날 거리에 나가 후남의 물건을 몇 가지 샀다. 경험이 없는 처지라 대충 목도리와 장갑, 자줏빛 운동화, 그리고 온 가족이 나눠 먹을 비스킷 선물 세트 한 상자 등이다. 또한 나중에야 생각이 나서 아주머니의 목도리와 쥐색 털장갑을 더 샀으나 막상 어떻게 전하면 좋을지 막막했다. 결국 전부 아주머니 앞에 내밀었다.

“아이고머니나, 이게 다 뭐람. 아니, 이거 후남이 거 아녀? 그리고 이건 내 것이겠구먼.”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아이고, 후남아. 이게 웬일이냐, 내 자식아….”

딸애를 와락 껴안고 귓가를 쩌렁쩌렁 울려대는 참에 소년은 부끄럽고 겁이 나서 어찌할 줄 몰랐다.

다음 날 이 목수와 윤 군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 후남의 모습이 보였다. 이웃집의 낡은 비닐 장판을 씌운 허름한 평상에 앉아 길 모퉁이를 보고 있다가 그들이 나타나자 놀란 듯이 일어섰다.

“저것이?”

이 목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러나 윤 군의 마음속엔 뜨거운 분수가 순식간에 뿜어 올랐다. 그녀의 가련함이 가슴을 쳐오고 있었다. 그 후로 그들이 일을 나가는 날엔 언제나 거기서 기다리곤 했다.

여름과 가을 그리고 추운 겨울에도 한결같이 나와 기다리다가 그들이 나타나면 조금 뒤로 물러서고 그들이 지나가면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얼굴은 평화로웠고 그를 쳐다보는 눈빛에도 성숙한 신뢰가 넘쳐 있었다. 어느덧 소년에게도 이상한 타성이 생겨 오히려 그녀의 눈길이 가까이 없을 땐 옷을 벗은 듯이 춥고 그녀가 지켜보고 있어야 몸과 마음이 훈훈하게 덥혀졌다. 여전히 말수는 적었으나 가끔 맑은 웃음소리를 내고 머리도 곱게 빗질하는 후남의 변화에 이 목수 부부도 감동하는 것 같았다.

새해를 넘기고 부산하던 음력설도 지난 2월 초순이었다. 이 목수의 단골이라는 어느 집에서 망가진 기물들을 보수해 주고 오는 길에 뜻밖에 이 목수가 이런 말을 해왔다.

“오늘은 자장면이나 먹고 들어가자.” “자장면을요?” “그래, 중국집 자장면 말이다.”

둘은 가까운 중국집에 들어가 자장면 두 그릇을 시키고 이 목수는 따로 배갈 한 병을 더 시켰다.

“한 잔 하겠나?” “아, 아뇨.”

한참 침묵이 흐르는 동안에 이 목수는 거나하게 취기가 오는 모양이었다.

“근데 말이야. 아들 녀석이 해외 취업을 나가게 됐거든. 워낙 기술이 없어서 막일로 가긴 하지만 녀석 다행히 몸이 좋아서 신체검사에도 합격했어.”“내 생각인데 말이야. 물론 자네 의향에 따라 할 일이지만, 거 어떻겠나?”

“….”

“아랫방이 비는데 이참에 자네하고 후남이가 아예 거처를 그 방으로 한다면 어떨까 싶네만. 집사람도 원하고 있고.”

그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 하기도 했다.

“밑도 끝도 없이 하는 말이 아닌 게야. 자네도 스무 살이 찼으니 호적 올리는데도 탈이 없겠고… 못 알아듣겠나? 자네가 내 딸과 혼인하여 평생 자식노릇 해줬음 하는 건데….”

여전히 그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자네 정말 아무도 없는 게여? 누구 부를 사람 하나도 없어?”

이 목수는 호기 있게 한참을 지껄이더니 불그레한 눈에 눈물을 하나 가득 담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갑자기 이렇게 의기소침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염치없네만, 사실 염치야 없지만도….” 굵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저씨, 그렇게 하겠어요. 댁에 온 후로 저도 행복을 안 것 같았습니다.” 윤 군은 수그렸던 얼굴을 들고 나직이, 그러나 확신 있게 그에게 대답했다.

“그래, 고마우이. 그러고 자식은 좋은 놈으로 낳을 것이구먼. 어렸을 땐 그 애도 여간 실하고 귀엽지 않았으니까.”

이 목수는 다시 한 번 윤 군의 손을 힘차게 잡아 흔들었다. 그 밤은 무척 추웠는데도 후남인 역시 나와 있었다. 털스웨터에 털목도리를 두르고 머리를 무릎 위에 얹어 몸을 동그랗게 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한기 속에서 기다리다 못해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다. 이 목수가 그 앞에 가서 딸을 흔들었다.

“얘, 후남아!” 그가 이처럼 부드럽게 딸을 부르는 소리를 이제까지 들은 적이 없다. 천 번 만 번 고통의 흙탕물에서 건져 올린 어버이의 사랑이 지금 눈부신 광채를 내고 있는가. 소녀는 눈을 뜨고 부스스 일어나 의자 밑의 고무신을 신었다. 이 목수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껴안은 채 걸어가고, 가게에서 새어나온 불빛은 이들 부녀를 은은하게 비춰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감 있고 아름다웠다.

소년은 그 뒤를 따르면서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지금의 그 자신이 뭔가 매우 진실한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동서남북도 분간 못할 황막한 천지에서 한 가닥 불길은 언젠가 영화에서 본 이소룡에 대한 감격이었고 은밀한 열정으로 몇 해를 두고 그 동경을 불태웠다. 이미 그 꿈은 사라졌으나 전혀 상처가 되진 않았다. 꿈과 현실은 차례로 흘러가고 지금 눈앞에 다다라 있는 것은 아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될 심히 측은한 어린 여자이며 한 줄기 눈빛이었다. 하나뿐인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듯 미숙한 그 자신을 통해 커다란 세계와 화친의 악수를 하려 한다.

“안네. 살아서 눈앞에 있어 준다면 무엇이나 다 해줄 텐데….” 옛날의 노트 속에서 한 구절이 튀어나와 밤하늘에 선명한 애드벌룬으로 떠오른다.

“살아서 내 눈 앞에 있구나. 살아서….”

소년은 갑자기 어른이 된 듯싶었고 이제야 남자가 된 듯이도 여겨졌다. 그는 가슴속에서 강하게 솟구치는 맹렬한 힘을 느끼고 있었다.

글_ 김남조 시인·그림_송영방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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