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가득 차서 텅 빈… 그 상흔이 맺혀 있었다

너무 가득 차서 텅 빈… 그 상흔이 맺혀 있었다

윤수경 기자
윤수경 기자
입력 2025-08-26 00:42
수정 2025-08-26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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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사후 국내 첫 회고전

“6·25 때 동창 120명 중 60명 죽어
그 상흔을 생각하며 물방울 그려”
‘상흔·현상·물방울·회귀’ 4장 구성
미공개작 31점 포함 120여점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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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화백의 ‘물방울’(1971). 작가의 최초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1972년 작 ‘밤에 일어난 일’보다 1년 앞서 그려진 작품으로 전시를 통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수많은 물방울을 그렸지만 똑같은 물방울은 단 한 점도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1971). 작가의 최초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1972년 작 ‘밤에 일어난 일’보다 1년 앞서 그려진 작품으로 전시를 통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수많은 물방울을 그렸지만 똑같은 물방울은 단 한 점도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물방울은 자신의 상(像)이 증오스러워 안간힘을 쓴다. 그걸 빨아들이고, 그런 다음 물어뜯고, 그런 다음 말살하려고… (중략) … 그것은 간데없고, 물방울은 떨어지며 마른다.”

프랑스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시인인 알랭 보스케는 ‘무슈 구뜨’(물방울 씨)로 통했던 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선보이는 전시 ‘김창열’은 투명하고 영롱한 물방울 이면에 담긴 의미를 찾는 여정과 같다. 작가의 작고 이후 국내 미술관에서 열리는 첫 회고전이다.

연대기적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그가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발생한 현대 추상미술 운동)에 심취했을 때의 작품부터 1965년 미국 뉴욕 시기, 1969년 프랑스 파리 정착 이후 작품까지 미공개 31점을 포함한 120여점을 선보인다. 미공개 작품에는 최초의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1972년 작 ‘밤에 일어난 일’보다 앞서 제작된 1971년 물방울 회화 2점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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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화백의 ‘물방울’(1971). 작가의 최초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1972년 작 ‘밤에 일어난 일’보다 1년 앞서 그려진 작품으로 전시를 통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수많은 물방울을 그렸지만 똑같은 물방울은 단 한 점도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1971). 작가의 최초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1972년 작 ‘밤에 일어난 일’보다 1년 앞서 그려진 작품으로 전시를 통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작가는 수많은 물방울을 그렸지만 똑같은 물방울은 단 한 점도 없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는 ‘상흔’, ‘현상’, ‘물방울’, ‘회귀’ 네 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첫 번째 장인 ‘상흔’에서는 해방과 분단,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면서 예술세계의 주요 토대가 된 ‘삶과 죽음’을 내면화한 초기작을 만날 수 있다. 이 시기의 경험은 이후 물방울 작품들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작가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6·25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였다”고 밝히기도 했다.

두 번째 장 ‘현상’에서는 그동안 보기 어려웠던 뉴욕 시기 작품과 파리 전환기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기존 추상회화에서 물방울로 바뀌게 되는 조형적 징후들을 발견하게 된다. 뉴욕에서 파리로 이주하면서 제작한 ‘현상’ 연작은 기존의 차가운 기하학적 형태가 녹아내리는 듯 유기적 형상으로 바뀐다. 또 응집된 덩어리는 마치 인체의 장기처럼 점액질로 표현된다.

작가의 나이가 마흔을 넘어선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평생을 천착한 물방울이 등장한다. 파리 근교 마구간을 작업실로 쓰던 당시 아무렇게나 놓아둔 화폭 뒷면에 세수한 물을 뿌렸다가 맺힌 물방울을 발견하게 된다. 그 순간의 감동을 작가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화폭 뒷면에 물방울이 맺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걸 보았는데, 그게 무척 놀랍고 감동적이었어요. 텅 빈, 투명하고 무색무취인 그 작은 것들, 곧 사라질 테지만 옅은 빛 아래 아름답고 맑은 자태를 보이는 그것들을 두고 동양 철학에서는 ‘충만한 공(空)’이라고 했을 법합니다.” (프랑스 비평가 미셸 앙리시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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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육명심 사진작가가 찍은 프랑스 파리 시절 김 화백의 모습. 캔버스에 작은 물방울들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79년 육명심 사진작가가 찍은 프랑스 파리 시절 김 화백의 모습. 캔버스에 작은 물방울들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물질적 형상을 넘어 동아시아 철학 전통과 깊은 접점을 이루며 정신적 사유의 매개체가 된다. 물방울은 또 화면을 가득 채운 천자문과도 조우한다. 작가의 ‘회귀’ 연작은 삶의 상흔을 붓질로써 덮어 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학예연구사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단순한 시각적 재현이 아니라 애도의 수행”이라며 “반복되는 형상 속에 전쟁과 상흔을 꿰매려는 수행이 담겼다”고 설명했다.

세계적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 개최 시기(9월 3~6일)에 김창열 카드를 내세운 것에 대해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국현이 어떤 모습을 보여 줘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며 “한국 미술이 ‘단색화’로 시작해 1960~1970년대 아방가르드까지 소개된 상황에서 다음 타자를 고른다면 김창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창열이라는 예술가를 새롭게 발견하고 재정립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12월 21일까지.
2025-08-2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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