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탕평채의 진실

[열린세상] 탕평채의 진실

입력 2025-03-12 01:42
수정 2025-03-12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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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적이고 바른 정치 뜻하는 탕평
영조, 평생 업적 꼽았지만 완성 못해
본질 망각한 탕평채, 식탁에서 퇴출

식민지 시기 음식 연구가 홍선표는 ‘조선요리학’(1940년)에서 “예전에는 우리 조선에도 묵을 그대로 기름에 부쳐 먹을 줄은 알았지마는 묵에 숙주나물이나 그 외 나물을 섞어 먹을 줄을 몰랐던 것이나 200여년 전 영조 때 노소론(老少論)을 폐지하자는 잔치에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탕평채라 하였다”고 주장했다. 이후 영조가 탕평채를 만들었다는 주장이 통설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영조와 관련된 음식 문헌을 아무리 뒤져도 탕평채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와 정조 사후인 19세기 초·중엽 학자 조재삼은 ‘송남잡지’(1855년)에서 탕평채를 만든 인물로 영조가 아닌 송인명을 꼽았다. 그는 “청포묵에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서 만드니 바로 나물의 골동(骨董·비빔)이다. 송인명이 젊은 시절에 가게를 지나가다가 이 음식을 보고 사색(四色)의 당인(黨人)을 섞어 등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탕평 사업을 하였다”라고 적었다.

영조 때 좌의정 송인명은 당쟁을 억누르는 탕평책을 주동했던 인물이다. 그런 사정으로 인해서 조재삼은 ‘탕평채’란 음식의 이름을 송인명이 지었다고 본 듯하다.

탕평채의 ‘탕평’은 공자가 편찬한 ‘서경’의 홍범편(洪範篇)에 처음 등장한다. 한자 ‘탕평’(蕩平)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라는 뜻의 ‘탕탕평평’(蕩蕩平平)의 줄임말이다. 즉 군주가 중심이 돼 중립적이고 바르게 정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 웹사이트에서 한자 ‘탕평’을 검색하면, 영조대만 무려 345회나 나온다. 영조보다 재위 기간이 6년 적은 숙종대 47회에 비해 매우 많다. 그만큼 영조와 신하들은 탕평을 수시로 논의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펼친 이유는 숙종이 소론과 노론을 번갈아 가며 편을 들면서 상대방을 무력하게 만든 ‘환국 정치’의 폐해를 알았기 때문이다. 숙종의 환국 정치는 서로에게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이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강경파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온건파들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한의사 김민호는 영조가 소론과 노론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조정하면서 ‘심화’(心火)라는 병을 얻었다고 보았다. ‘심화’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조바심을 내고 불안 초조해하는 사람이 잘 걸리는 마음의 병이다.

젊을 때 영조는 강개(慷慨)가 대단해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수라를 거부하는 철선(撤膳)을 자주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황을 세밀하게 살피고 노심초사해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변해 갔다. 80세의 영조는 자신의 평생 업적 여섯 가지를 한시로 읊조린 ‘어제문업’(御製問業)이란 글에서 ‘탕평’을 첫 번째로 꼽았지만, 스스로의 평가는 “이 두 글자가 부끄럽네”였다.

영조가 탕평책을 펼치면서 등용한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는 시간이 갈수록 임금의 척신으로 변질했다. 결국 영조 사후 19세기 조선의 권력은 임금의 외척인 권세가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조선의 27명 임금 중 가장 장수한 영조도 탕평을 완성하지 못했다. 본디 탕평은 사람들의 바람이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세도정치의 폐해를 눈앞에서 겪고 있던 19세기 서울 사람들이 청포묵과 나물을 함께 섞은 음식을 두고 영조 때를 그리워하며 ‘탕평채’라고 불렀을 것이다.

12·3 내란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 극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나타나 많은 국민이 ‘심화’를 앓고 있다. 이런 사태를 두고도 ‘정치적 탕평’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20세기 초반, 탕평채가 인기를 끌자 식객들 입맛을 유혹한다고 양지머리나 차돌박이를 넣는 음식점도 생겼다. 하지만 이들 재료가 청포묵의 맛마저 삼켜 버리자 식객들은 외면했고, 결국 식탁에서 퇴출당했다. 이것이 탕평채의 진실이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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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인문학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인문학자
2025-03-1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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