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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엄친아’의 배신/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열린세상] ‘엄친아’의 배신/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입력 2014-11-07 00:00
업데이트 2014-11-07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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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여고 동창생 모임은 정보의 보물 창고다. 자녀가 고등학생 때까지는 공부 잘하는 자식 둔 친구들 어깨에 콘크리트(?)가 들어간다. 친구들로부터 질시와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실상 부러움의 대상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잘난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들이 대학 졸업 후 남들 부러워하는 직장에 당당히 취직하는 순간 엄마의 자존심은 정점을 찍게 된다. 한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들딸 자랑도 모자라 며느리, 사위 칭찬에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친구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어깨도 늘어지고 자식 이야기도 시들해지고 만다. 그 잘난 ‘엄친아’의 배신(?)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동창 모임에서 들은 실화다. 명문대 졸업에 일류 직장까지 엄마 인생 최고의 선물이던 아들. 보란 듯이 장가를 보냈는데, 아들 녀석이 엄마는 뒷전이요, 제 마누라만 챙기는 통에 벙어리 냉가슴 앓는 날이 늘어만 갔단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내외가 다니러 왔다길래 아들 며느리 앞세워 마트에 장 보러 갔는데, 아들 내외가 카트에 정신 없이 물건을 담더란다. 괘씸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해서 “너희 건 너희가 계산해라.” 한마디 했더니 한가득 카트에 담았던 것들을 하나씩 제자리에 가져다 놓더라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부모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 자라 준 것은 고마운 일이겠으나, 그만 부모로부터 받는 데만 익숙한 나머지 돌려줄 줄 아는 배려심은 조금도 배우지 못한 기형아가 되고 만 것이다.

요즘 한창 개발 중인 세종시 주변에선 신(新)효자 이야기가 흘러 다닌다. 어린 시절 공부 잘해 효도하던 자식 둔 집안은 논밭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고 나니 보상받을 땅 한 뙈기 남지 않았고, 노후를 어찌 보낼지 캄캄하기만 한데, 어린 시절 공부 못해 불효하던 자식 둔 집안은 논도 그대로 남고 밭도 그대로 굳은지라 정부로부터 보상받아 큰 목돈을 손에 쥐게 되었음은 물론 노후 걱정도 단숨에 덜었다는 게다.

엄친아 덕에 가슴 쓸어내린 아버지 이야기도 들려온다. 명문대 졸업한 장남. 사업하고 싶다는 간청에 친척 친구들 돈 끌어모아 사업자금 대주었는데 2년 만에 빚만 잔뜩 안고 사업을 접었단다. 사업자금 지원한 아버지는 요즘 친척들 앞에서 얼굴 한번 제대로 못 드는 데다 친구들 모임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는 소식이다. 한데 공부는 뒷전에 가출을 밥 먹듯 하던 막내 아들. 어차피 대학은 못 가니 준비한 등록금 빌려 주시면 10년 후 배(倍)로 갚아드리겠다는 부탁에 잃어버리는 셈치고 등록금에 해당하는 돈을 내주었단다. 그 아들은 필리핀으로 건너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이젠 제법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는데, 10년 전 약속에 외제 승용차 선물까지 덤으로 안겨 주었다는 게다. 누가 효자인지 길고 짧은 건 대 봐야 한다는 옛말이 저절로 생각나더라는 것이 두 아들 아버지의 고백이었다는 후문이다.

건설 현장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63세의 내장 목수 김씨는 연중 일이 끊이지 않고, 방조망 사업에 뛰어든 지 30년이 넘었다는 59세의 조씨도 전국 각지에서 자신을 부르는 통에 일감이 몰리는 철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게 살아가며, 초등학교 졸업장이 유일하다는 75세 정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나무 이식(移植) 기술자로 지금도 남부럽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이제 우리네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제대로 터득한 숙련 기술만 있으면 안정된 생활에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건만, 너도나도 대학을 가다 보니 현장에서 몸을 움직여 기술을 연마하기보다는 사무실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업무를 선호하게 된 나머지 굳이 대학 졸업장이 필요 없는 블루칼라직의 ‘공동화’가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른지. 블루칼라직의 자부심을 자녀 세대에 물려 주지 못한 건 자녀 교육에 ‘올인’해 온 베이비붐 세대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인 듯하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를 지나온 베이비부머들은 대학 교육이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통로라 믿었기에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지만, 이제 대학 교육은 더이상 계층 상승의 사다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뿐이랴. 부모의 사랑과 자랑의 대상이었던 ‘엄친아’들이 보기 좋게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기 시작했음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 남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 100세 시대를 지나가야 하니 말이다.
2014-11-0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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