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만감(萬感)이 스민 서울 동네들/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만감(萬感)이 스민 서울 동네들/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입력 2013-02-12 00:00
업데이트 2013-02-1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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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서울은 세계 굴지의 역사도시이다. 역사가 만들어낸 의미의 세계가 거리와 동네 이름에 스며들어 있어, 그 이름만 들어도 슬프고 아련하고 기쁘고 즐거우며 놀랍고 한스럽다.

나는 서울에서도 동호와 금호라는 이름을 좋아한다. 3호선 전철을 타고 동호대교를 건널 때면 한강의 풍광에 넋을 빼앗기곤 한다. 동호는 그곳 한강의 굽이가 호수같이 잔잔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 마포 앞의 한강을 서호라고 부른 것과 대칭된다. 금호는 지금 한자로 金湖라고 표기하지만 본래는 비단 같은 호수라는 뜻으로, 동호 일대의 다른 이름이다. 동호대교에서는 응봉 위의 독서당이 바라보인다. 퇴계 이황도 젊은 시절 거기서 공부할 때 동호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을 것이다.

한강의 경강 유역에 해당하는 곳에는 정자가 있어서 거리와 동네 이름이 생겨난 곳도 적지 않다. 서울 동쪽의 화양동이나 사가정 길은 대표적인 예이다. 화양동은 화양정에서 유래되었다. 화양은 화산 남쪽이란 말인데, 화산은 곧 삼각산을 가리킨다. 본래 태복시의 목장이 있었는데, 세종 때 그곳에 정자가 들어섰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2009.2.13)에 따르면, 이 마을을 ‘회행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것은 단종이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꼭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회행리는 화양리의 와전일 터인데, 단종의 죽음 이후에 이런 전설이 부회된 듯하다. 화양정은 정조 대왕이 남한산성에 행차할 때 이곳을 지나가 광나루로 나아간 길목에 있어 서울 동부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사가정은 한자로 四佳亭. 조선 세종~성종 때 활동한 문신 서거정의 정자이다. 서울지명사전은 사가정길이 아차산 한강 건너 고원강촌(몽촌토성)에 살던 서거정의 호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설하되, ‘사가’의 뜻을 알려주지 않아 아쉽다. ‘사가’는 북송 때 학자 정호의 시 가운데 ‘사계절의 멋진 흥취, 인간과 함께하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정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한가로워 일마다 차분하니, 잠에서 깨어나면 동창의 해가 이미 붉구나. 만물을 살펴보면 모두가 자득하고, 사계절 멋진 흥취가 사람과 함께하네.” 사람들 모두 자기가 있어야 할 곳에 편히 거처하면서 삶을 즐겁게 꾸려가는 세상을 꿈꾼 것이다. 서거정은 사계절이 각자 소임을 마친 뒤에 물러나는 것처럼, 자신도 국가에 공을 세우면 은둔하여 여생을 유유자적하게 보내겠다는 뜻을 정자 이름에 담았다.

군자동에 대해, 서울지명사전은 옛날 어느 왕의 일행이 거둥하다가 마침 이곳 동2로 변(전 남일농장 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동행한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는 전설에 따라 임금의 아들을 낳은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명려궁의 진위는 알 수가 없고, 왕비가 옥동자를 낳았다는 설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군자는 소나무나 연꽃을 가리킨다. 소나무는 한겨울에도 푸른 색을 잃지 않아 군자가 절개를 지키는 모습과 비슷하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나왔지만 흙에 더러워지지 않고, 속이 비고 밖으로 곧은 게 군자의 고결한 모습과 닮았다. 서울이나 지방에는 소나무가 우뚝하고 연꽃이 피어나는 곳에 군자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많았다. 서울의 궁궐 북쪽에는 국왕이 거둥하는 군자정이 있었는데, 이곳은 연꽃이 유명하였다. 서울 동쪽 군자동에도 아마 군자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 오래 살았으면서도 거리와 동네 이름에 대해 유래를 모르는 곳이 참 많다. 서울 4대문 안에서 조선시대의 관청과 방(坊)을 근거로 삼은 지명은 대개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에 동네가 통합되거나 분리되면서 많은 이름들이 달라졌다. 성저십리에 해당하던 곳과 1960년대 이후 개발된 곳은 유래를 추정하기조차 어려운 지명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서울의 거리와 동네 이름이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실로 서울은 지명들의 코스몰로지이다. 이 귀중한 콘텐츠를 연구하여, 선인들의 넉넉한 정신과 강인한 삶을 배울 필요가 있다.

2013-02-1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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