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밤이 익는 밤/황수정 논설위원

[길섶에서] 밤이 익는 밤/황수정 논설위원

황수정 기자
황수정 기자
입력 2019-10-28 23:56
업데이트 2019-10-29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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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누구에게나 다른 향기로 익어 간다. 나의 시월은 엉덩이가 새까만 솥냄비, 매캐한 불내로 깊어 간다.

풀모기에 발목을 뜯겨 가며 누가 주워 왔던 것인지, 자루째 사들였던 것인지. 우리집 장독대의 됫박에는 눈부시게 물광이 나는 알밤이 이즈막 거의 날마다 소복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생밤을 안친 마당귀의 솥단지에서는 한바탕 난리가 났다. 다른 국솥들은 행여나 태워 먹을까 불단속에 종종걸음이던 엄마는 그 솥단지만은 밑이 그을려 구멍이 나든 말든 내버려 두셨다. 솥의 물이 졸아붙도록 모른 척하자면 퉁! 퉁! 기어이 알밤이 껍질째 터지고 말던 소리. 속이 터진 알밤에 솥뚜껑이 휘까닥 벗겨져 저만치 날아간 날도 있었다. 눈을 마주치며 식구들 웃음은 담장을 넘었고.

꺼멓게 그을리고 속이 터져도, 득의만만 깊어지던 그런 밤은 살면서 다시 왔던가 오지 않았던가. 내가 좋아했던 것은 솥단지에서 잘 구워진 알밤이었는지, 솥단지를 태우며 잘도 깊어 가던 가을밤이었는지. 뜨거운 솥단지를 어디다 두고 나는 잊었는지.

멀쩡한 냄비 하나를 오늘은 작심하고 태워 먹는다. 생밤은 눌어 타고, 내 마음은 졸아 타고, 시월의 그믐밤은 간당간당 애가 타고.

sjh@seoul.co.kr
2019-10-29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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