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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의 詩와 視線] 아비의 슬픔과 시의 육성/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정은귀의 詩와 視線] 아비의 슬픔과 시의 육성/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입력 2022-11-23 20:30
업데이트 2022-11-24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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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망치를 줘, 방울을 줘,
종소리를 듣고 마법을 들어 봐
도끼를 줘, 나무를 줘
통나무에 천천히 불이 붙는 걸 봐.

우리 다시 만날지 누가 알겠어?
어딘지도 모르고 언제인지도 몰라
어쩌면 영원히 어쩌면 지옥에서
얘야, 잘 가라, 잘 가거라! (중략)

이보다 더 힘든 길을 본 적이 없어,
내게서 멀어져 네가 걷고 있는 이 길.
내 부탁 들어줘, 노래를 불러 줘
시간이 다 갔어, 하루가 너무 기네,

우리 다시 만날지 나는 알지 못해.
아마도 만나겠지, 지옥 어딘가에서
방법은 모르고 언제가 될지도 몰라.
그러니 얘야, 잘 가렴, 잘 가렴!

-찰스 번스틴 ‘잘 가, 잘 가’ 중

미국의 시인 찰스 번스틴이 아끼던 딸을 잃은 후 가눌 길 없는 슬픔 속에 쓴 시다. 딸 이름은 에마. 가능성이 무궁한 큐레이터였다. 시인 아버지와 화가 엄마의 재능을 골고루 물려받은 맏이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감수성과 뛰어난 예지로 이 세계의 아픔을 앓으면서 둔탁한 세계의 모서리를 예술로 두드렸다. 미국 사회가 세계 질서 안에서 폭력과 전쟁을 택할 때 그 방향에 절망한 에마는 새로운 연대를 만들기 위해 나름으로 애썼으나 결국은 죽음으로 걸어갔다. 이 시는 에마의 죽음 이후 아비가 시로 쓴 통곡이다.

“망치를 줘, 방울을 줘, / 종소리를 듣고 마법을 들어 봐” 시는 죽은 딸에게 건네는 대화로 시작한다. 아비는 어린 딸과 같이 방울을 흔들며 놀던 추억을 떠올린다. 단순한 추억 놀이가 아니라 슬픔에 어찌할 바 모르는 자신을 깨우는 것처럼 들린다. 망치로, 방울로, 도끼와 나무로. 도끼는 ‘불멍’을 위해 불을 붙일 나무를 자르기도 하지만 슬픔에 젖은 시인 자신을 떵떵 깨치는 도구다. 죽음 앞에 절망할 때 우리는 흔히 다시 만나자는 약속으로 위로하는데, 이 시의 화자인 아비는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딸을 놓친 회한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아비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이라는 먼 길로 떠난 딸의 걸음을 걱정한다. 죽음 이후를 아비가 함께 앓는 것이다.

“이보다 더 힘든 길을 본 적이 없어” 죽어 저 세상으로 가는 딸에게 아비는 말한다. 한 번만이라도 보면 좋을 딸을 다시 만나리란 믿음을 간신히 붙잡고 있지만 회한과 슬픔으로 몸서리치는 아비는 다시 만나더라도 지옥 어딘가에서 만나리라 고백한다. 사랑하는 딸을 구하지 못하고 보낸 아비의 목소리는 이 세상에서 자식을 잃고 속울음 우는 수많은 아비의 통곡을 고스란히 되살린다.

너 혼자 어떻게 그 길을 가니?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날을 어미 아비는 견뎌야 하니. 이토록 참혹한 이별 앞에서 우리는 적절한 애도의 방식을 찾지 못해 아프다. 일하다 떨어져 죽고, 공부하다 아파서 죽고, 경쟁에 내몰려 시들어 죽는 청춘들, 이제는 걷다가 서서 죽은 청춘들을 보내야 하는 우리의 참혹한 나날. 책임져야 할 정치는 회피와 무책임 일색인데, 이토록 아픈 시의 육성이 유일하게 위로가 된다.

2022-11-2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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