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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줄 속인 첼시 리보다 덮어준 연맹이 더 밉다

핏줄 속인 첼시 리보다 덮어준 연맹이 더 밉다

임병선 기자
입력 2016-09-23 17:40
업데이트 2016-09-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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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리의 혈통 사기 전모 추적

2015~16시즌 여자프로농구 하나은행의 준우승 기록이 삭제됐다. 범죄 의도가 명확한 첼시 리(27)의 ‘혈통 사기’ 때문에 그와 함께 땀흘린 동료들이 일궈낸 준우승 영예도 허공에 흩어졌다. 이를 막지 못하거나 방조한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검찰 수사 발표 100일이 지나도록 책임지는 이가 없다.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음달 29일 2016~17시즌 개막을 준비하고 있다. 선수들의 피땀을 날려버린 것과 팬들을 실망시킨 것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새 시즌에 누가 신뢰와 성원의 박수를 보낼 수 있을까 의아하기까지 하다. KEB 하나은행 구단 간부들만 제재하곤 허술한 승인으로 범죄에 동조한 연맹의 책임을 스스로 뭉개고 있다. 한 시즌 내내 이어진 사기극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언론도 정면으로 연맹의 책임을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지난 두 달여간 이 일에 간여한 이들과 연맹의 잘못을 누구보다 아파하는 이들과의 이메일 인터뷰와 면담을 통해 이 희대의 사건 전모와 연맹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돌아본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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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6시즌 여자프로농구를 희대의 블랙코미디로 얼룩지게 만든 첼시 리. 하나은행의 준우승 기록과 본인 기록은 삭제되고 WKBL 리그는 혈통 사기에 놀아난 리그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사진은 지난 4월 특별 귀화 신청을 심사하는 대한체육회 공정위원회에 출석해 진술하던 첼시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2015~16시즌 여자프로농구를 희대의 블랙코미디로 얼룩지게 만든 첼시 리. 하나은행의 준우승 기록과 본인 기록은 삭제되고 WKBL 리그는 혈통 사기에 놀아난 리그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사진은 지난 4월 특별 귀화 신청을 심사하는 대한체육회 공정위원회에 출석해 진술하던 첼시의 모습이다.
연합뉴스
2015년 4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근처 어바인에서 첼시와 그의 미국 에이전트 코리 매코이가 A구단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모든 일이 시작됐다. 매코이는 첼시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며 1989년 태어난 첼시의 출생증명서를 제시했다. 이상하게도 반쪽이 테이프로 붙여진 채 복사된 문서였다. 부친의 국적란에 ‘Seoul Korea’라고 돼 있었고 부친의 사회보장번호 없이 모친 것만 있어 A구단 관계자들은 이것부터 미심쩍어했다.

매코이와 A구단의 다리 역할을 맡은 재미교포 X씨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실 X씨는 2014~15시즌 중 다친 외국인 선수의 대체 선수를 물색하던 B구단과 매코이를 연결해 준 인물이었다. 당시 매코이는 첼시의 증조할머니가 한국인이라고 했다. WKBL의 해외동포선수 자격에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X씨는 2007년부터 계속해서 동포 선수를 WKBL에서 뛰게 하는 데 역할을 했던 에이전트라 그때도 동포 선수와 계약할 때 반드시 필요한 가족관계증명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매코이는 첼시가 루마니아에 있어 서류를 떼려면 자메이카에 다녀와야 한다고 했다. B구단은 서류도 불충분하고 샐러리캡도 남아 있지 않아 영입을 포기했다.

X씨는 매코이와 A구단을 연결하면서 다시 가족관계증명서를 요구했고, 매코이는 자메이카까지 가야 한다는 얘기를 되풀이했다.

오전에 테스트를 마친 매코이와 첼시는 오후에 계약 조건을 논의하기로 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 A구단 관계자들과 X씨는 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8시간 뒤 돌아온 둘은 로스앤젤레스에 쇼핑을 다녀왔다고 둘러댔다.

매코이는 첼시의 계약 조건에 대해 굉장히 자신 있는 태도로 50만 달러는 줘야 한다고 했다. A구단은 첼시의 서류가 완벽하게 구비되면 7만 달러를 줄 수 있다고 맞섰다.

그렇게 헤어진 다음날 A구단 관계자들은 이튿날 로스앤젤레스 공항 출국장에서 박종천 하나은행 감독, 재미교포 에이전트 Y씨와 마주쳤다. 같은 비행기로 어색하게 귀국했다. 박 감독은 외국인 선수 테스트 때문에 왔다고 설명했지만 A구단 관계자는 매코이가 박 감독과 접촉했으며 그 결과 몸값을 그렇게 높여 불렀구나라고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매코이와 하나은행은 Y씨를 에이전트로 삼아 계약했다. X씨는 이 과정에 WKBL 지도부가 간여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박 감독은 두 달 뒤 미국 뉴욕 맨해튼 술집에서 A구단과 B구단 관계자들, X씨에게 ‘첼시를 가로챈 것 같아 선배로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박 감독은 Y씨에게 5000달러를 건네 사립탐정을 고용, 첼시의 한국인 친할머니를 찾았다며 곧 첼시를 한국에 데려온다고 했다. 할머니 이름이 처음에는 ‘김복순’이었는데 어느 순간 ‘리현숙’으로 바뀌었다. 두 구단 관계자들은 다른 팀이 교섭 중인 선수를 접촉하지 않는다는 농구계 신사협정을 파기한 것을 지적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 구단 모두 첼시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고 했다가 두 달 만에 한국인 친할머니를 찾았다고 말이 바뀐 것도 이상한 일이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A구단에 입단하려던 해외동포 선수들에게는 가족관계 증명서, 부모의 주민등록등본과 여권 사본, 본인의 출생증명서 등을 요구했지만, 첼시를 영입한 하나은행에는 본인과 부친의 출생증명서, 할머니의 사망증명서만 제출하도록 허용한 것도 의아한 대목이었다. WKBL은 아주 어렸을 때 입양됐다는 점, 부친과 할머니가 모두 사망한 점을 예외 승인의 이유로 들었다.

와 A구단, C구단 관계자는 지난해 6월 중순부터 2015~16시즌 개막을 앞두고 미디어데이를 개최한 10월 19일까지 계속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X씨는 미국에서 직접 전화를 걸어 양원준 사무총장 등에게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양 총장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연맹의 자문변호사도 괜찮다는데 왜 너만 그러느냐”고 핀잔을 놓았다. WKBL의 한 팀장은 ‘왜 다른 동포 선수에게는 부모의 국적포기증명서 등 상식적이지 않은 서류까지 요구하면서 첼시에게는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관계증명서조차 요구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자 “그건 X씨가 알 바 아니다”라고 면박을 줬다.

WKBL이 연맹 자문변호사로부터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 것은 ‘아포스티유’를 발급받았기 때문이었다. 정식 명칭은 ‘외국 공문서에 대한 인증의 요구를 폐지하는 협약’인데 줄여서 ‘아포스티유 협약’(Apostille Convention)이라고 한다. 복잡한 인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아포스티유 확인만으로 외국 공문서의 효력을 인정하도록 한 다자간 협약이다. 가입국끼리는 공문서를 제출하기 위해 해당 국가 영사기관의 확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

A구단과 C구단 관계자들은 우리네 공증 절차와 마찬가지로 얼마 안 되는 돈만 쥐어 주면 발급받을 수 있는 허술한 아포스티유로는 첼시의 서류가 적법하게 발급받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WKBL에 첼시의 선수 등록을 유보하더라도 미국 대사관 등 미국 사법기관을 통해 서류를 발급한 기관이 적법하게 발행했는지 크로스 체크하자고 요구했다. 하지만 묵살됐다.

으로 첼시의 혈통 사기를 막을 수 있는 기회는 미디어데이 직후 열린 이사회에서 주어질 수 있었다. 절반이 넘는 구단 단장들이 미심쩍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첼시의 선수 등록을 유보하고 검증하자고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신선우 총재의 ‘뒷배’로 여겨지는 여권 실세의 매제이자 보좌관이 연맹의 특별고문 자격으로 참석하자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모기업이 금융권인데 실세의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X씨는 며칠 뒤 한 구단 관계자로부터 “신 총재가 하나은행을 제대로 밀어주려고 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A구단 관계자는 “리그가 인기도 있고 형편이 넉넉하다면 연맹이 저지른 잘못을 어떻게든 바로잡겠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왔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어 “연맹과 구단들, 리그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같아 솔직히 입 밖에 내기도 부끄럽다”고 자책했다. C구단 관계자는 “지금은 구단들이 숨죽이고 있지만 실세와 신 총재의 영향력이 예전과 같지 않다고 판단되면 구단들도 제 목소리를 내 다시 (첼시 문제로)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2015~16시즌이 시작돼 첼시가 1라운드 최우수선수(MVP)를 수상하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WKBL 안에서 그녀의 혈통 증명을 정밀하게 해보자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언론도 일부 매체가 번갈아 가면서 단편적인 문제제기만 했을 뿐이다.

첼시는 지난 3월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기자단 투표 93표 중 90표를 얻어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6관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수상 소감으로 “내 몸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지금 돌아보면 소름 끼치는 멘트를 남겼다. 귀화시켜 국가대표팀에 선발해야 한다는 여론에 떠밀려 대한농구협회, 대한체육회 등이 일사천리로 법무부에 특별 귀화 신청을 했고 이를 심사하는 과정에서 부친과 할머니 서류 모두 가짜인 것으로 들통나 지난 6월 영구제명됐다.

당초 부적격 선수 첼시와 한 시즌을 함께 뛰었던 6개 구단 120명 안팎 선수들의 모든 수고와 고통이 오롯이 담긴 기록들도 삭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나은행의 준우승과 첼시 본인의 기록만 삭제된다. 이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 어이없고 허망한 일이다.
2016-09-24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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