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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깨스트] ‘영초언니’도 국가소송 패소… ‘양승태 대법원’이 막은 긴급조치 배상

[판깨스트] ‘영초언니’도 국가소송 패소… ‘양승태 대법원’이 막은 긴급조치 배상

허백윤 기자
허백윤 기자
입력 2019-05-24 16:26
업데이트 2019-05-2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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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숙 제주올래 이사장이 쓴 책 ‘영초언니’의 표지. 문학동네
서명숙 제주올래 이사장이 쓴 책 ‘영초언니’의 표지. 문학동네
‘영초언니는 제게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였고, 저를 이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이었고,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습니다. 천영초 선배는 긴급조치 시대 대학가의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였고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이지만, 이제는 완벽하게 잊혀버렸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역사를 기록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17년 5월 출간된 책 ‘영초언니’의 주인공 천영초씨와 책을 쓴 서명숙 제주올래 이사장 등이 ‘긴급조치 9호’로 입은 피해를 배상해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패소했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에 불법행위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후 긴급조치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배상받을 길이 막혀있기 때문입니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부장 문혜정)는 지난 17일 천씨와 서씨, 안희옥씨와 가족, 고 유구영씨의 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고 판결했습니다.

●‘긴급조치 9호 위반’ 천영초·서명숙…국가배상 소송 패소

천씨와 서씨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는 유인물을 작성하고 유포했다는 이유로 1979년 4월 15일 영장없이 경찰에 체포돼 구금됐습니다. 그해 5월 16일 구속영장이 집행됐고 재판에 넘겨져 9월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12월에서야 구속집행정지 결정에 따라 석방됐습니다. 이들과 같은 날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체포·구금된 안씨는 재판에 넘겨지지 않고 석방됐고, 유씨는 1979년 3월 20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다가 12월 석방됐습니다.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1980년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항소심에서 모두 면소 판결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후 서울지역 노동조합협의회 정책실장과 민주노총 정책기획실 부국장 등을 지낸 유씨는 1996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재판에 넘겨졌던 인사들과 가족은 2013~2014년 서울고법에 형사보상을 청구해 270여일의 구금에 대한 보상을 받았고,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생활지원금을 지급받았습니다. 국가는 천씨와 안씨가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결정에 동의하고 보상금을 받아 재판상 화해의 효력이 발생했기 때문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헌법재판소가 “민주화보상법에는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이 포함돼 있지 않다”며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만큼 보상금을 받았어도 정신적 위자료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판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긴급조치 피해자라는 점이 배상의 길을 막았습니다. 이들은 2013년 소송을 내며 “당시 유신헌법에 규정된 긴급조치권의 목적과 발동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위헌·무효인 긴급조치 9호를 발령했으니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 자체가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심에서 유죄 판결을 선고한 것도 애초부터 위헌·무효인 긴급조치 9호에 의한 위법한 공권력 행사였고, 수사기관이 이들을 형사소송법상 구금기간을 넘어 체포·구금하고 가족 및 변호인의 접견을 일체 금지하고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한 것 역시 공무원의 고의나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였다고 주장했죠.

그러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법원(2010년)과 헌법재판소(2013년)가 긴급조치가 유신헌법과 현행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판단한 뒤 많은 과거사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법원에서도 잇따라 배상판결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법원에서 배상을 인정하는 부분은 주로 수사·재판과정에서 고문 등의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점에서 불법행위를 인정하는 경우였고, 긴급조치 발령 자체에 대해선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15년 3월 26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 때문입니다.

양 전 대법원장 시절인 2015년 3월 26일 대법원은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행위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인 만큼 불법행위가 아니라며 국민 개인의 국가배상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긴급조치가 사후적으로 법원에서 위헌·무효로 선언됐지만 당시에는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공무원들의 직무행위가 곧바로 불법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라

●양승태 대법원 “긴급조치 발동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

는 겁니다.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결정한 지난해 8월 30일 헌법재판소 결정에도 그러한 대법원 판결을 취소할 순 없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천씨 등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도 이러한 대법원 판단을 따랐습니다. 영장없이 체포·구금돼 1심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아 복역한 자체는 긴급조치와 관계 없이 불법행위가 맞지만, 이미 석방된 뒤 30년여가 흐른 뒤에야 소송을 제기해 소멸시효가 지났다고도 판단됐습니다.

다만 최근 법원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의 판단에 반하는 하급심 판결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7부(부장 임정엽)는 지난달 19일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체포·구금됐던 김모씨의 가족들이 낸 소송과 정모씨와 가족들이 낸 소송에서 각각 원고 승소 판결을 했습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 발령행위 자체가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면서 “긴급조치 위반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은 경우에는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불법구금 또는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어도 국가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앞서 2016년 당시 광주지법 민사합의13부(부장 마은혁)와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부장 김기영)도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하는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발령한 것이 불법이라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단을 했습니다.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이 파기돼 상고심에서 국가배상의 책임이 없다는 결론으로 확정됐지만요. 최근 서울중앙지법에서 나온 판결도 같은 내용의 판단이 담겼지만 지난해 헌법재판소에서 당시 대법원 판결을 뒤집을 수 없다고 판단한 뒤 나온 첫번째 하급심 판결입니다.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국가 배상의 길을 열어달라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주최로 국회에서 ‘긴급조치 피해자 원상회복 방안 토론회’도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 의원은 “긴급조치 위헌성이 확인됐지만 피해자에 대한 피해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고, 지난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간 중의 사법농단 의혹사건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기간 중의 사법농단 의혹사건 재판을 위한 특별형사절차에 관한 법’을 대표발의하기도 했습니다.

1979년 당시 첫 번째 공판에서 천씨는 법정에 들어서자마자 “독재정권 물러가라! 민주주의 쟁취하자!”며 목청을 높였다고 합니다.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아 천씨는 징역 2년 6개월과 자격정지 2년 6개월, 서씨는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은 그날엔 방청객들의 탄식과 함께 누군가가 법정에서 “사법부가 역사의 죄인이다!”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서 이사장의 책 ‘영초언니’ 속 기록입니다. 이들의 싸움과 외침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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