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이끈 광장 촛불…평화집회 선례 남겨

[대통령 탄핵]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이끈 광장 촛불…평화집회 선례 남겨

입력 2017-03-10 11:27
업데이트 2017-03-10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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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보다 더 무서운 정치”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을 이끈 것은 국회 등 정치권이 아니라 광장의 촛불 민심이었다.

촛불집회는 작년 10월29일 시작해 장장 20주 동안 이어졌다. 집회 참가자들은 처음부터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하야·퇴진을 요구하며 민심의 향방을 드러냈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까지 탄핵에 나서도록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촛불 시민들은 초기에 신중한 태도를 보인 야당을 질타하고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과 특검 실시를 압박했다. 헌법재판소를 향해서도 탄핵 인용을 강하게 요구했다.

촛불집회는 과격한 폭력시위보다 평화 시위가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는 평가도 받는다.

◇ 직접 민주주의의 장이 된 광장의 20주…“누적 1천600만명 참석”

첫 촛불집회인 지난해 10월29일 집회는 3만명(이하 주최 측 추산) 수준의 비교적 평범한 집회였다. 이때만 해도 박 대통령이 실제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비선실세’ 최순실씨 것으로 추정된 태블릿PC가 발견되고 박 대통령이 연설문 작성 과정에서 최씨 도움을 받았다고 인정한 직후였지만 집회 과정에서 주된 요구는 대통령 ‘탄핵’보다는 ‘하야’나 ‘퇴진’에 맞춰졌다.

그러나 불과 2주 뒤 민중총궐기를 겸해 열린 3차 촛불집회는 첫 집회 참가자의 30배가 넘는 100만명이 모여 박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후 최씨 딸 정유라씨의 입시부정이 드러나고, 박 대통령의 대국민담화가 오히려 시민의 반발을 사면서 참가자들이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탄핵안 발의·가결 바로 전주인 지난해 12월3일 열린 6차 집회는 232만명이 참가하는 최대규모 집회로 치러졌다.

정치권은 초기에 신중론과 탄핵 전 개헌론 등을 논의하며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촛불집회로 민심의 향방이 드러나자 본격적인 탄핵 추진으로 가닥을 잡았다.

같은 달 9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이후에도 촛불집회는 멈추지 않았다.

그 이튿날 집회에는 104만명이 모여 탄핵안 가결을 자축했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31일에도 110만명이 모여 누적 연인원 1천만명을 돌파했다.

새해 들어서는 상대적으로 참여 인원이 줄었지만 민중총궐기를 겸한 지난달 25일 집회와 이달 4일 탄핵 선고 전 마지막 촛불집회에는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여 헌재의 탄핵 인용을 촉구했다.

퇴진행동은 이날까지 주말 촛불집회 참가자가 전국 기준 누적 1천587만 3천명이라고 추산했다.

단순히 구호를 외치고 행진해 세를 과시하는 데서 벗어나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자유발언·토론회와 다양한 문화행사 등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장을 연 것도 촛불집회가 ‘롱런’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꼽혔다.

촛불집회 주최 측인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의 남정수 공동대변인(민주노총 대변인)은 “광화문광장이 대한민국을 바꾸는 정치였고 촛불이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보다 더 무서운 정치였다”며 “민심이 모이면 태산도 옮길 수 있고 ‘절대권력’ 대통령도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논평했다.

국회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도 “박 대통령 탄핵은 사실상 촛불 민심이 이끈 것”이라고 촛불집회의 의의를 평가했다.

◇ “세월호·백남기 등 저항이 촛불집회 바탕”

퇴진행동의 촛불집회만 해도 20주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박근혜 정권 내내 이어져 온 수많은 단체·계층의 투쟁과 저항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이 2014년 4월16일 이후 3년 가까이 농성과 투쟁을 벌이면서 촛불집회에도 앞장선 것이 대표적이다.

어린 나이의 고등학생들이 희생자였던데다 구조 등 과정에서의 문제도 불거짐에 따라 유가족의 진상규명 요구에 공감하는 시민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국회에서 가결된 탄핵안에도 참사 당일 이른바 ‘대통령의 7시간’이 적시됐다. 야당이 탄핵안 가결 때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을 유가족들에게 배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탄핵심판 과정에서도 헌재가 대통령 측에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을 묻는 등 쟁점이 됐다.

그 밖에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 물대포에 맞고 숨진 농민 백남기씨 사건과 역사교과서 국정화, 노동계가 ‘친재벌 정책’이라고 규정한 노동 정책, 일본군 ‘위안부’ 등으로 대표되는 외교 정책, 여성이 안심할 수 없는 사회 등에 대한 국민적 반발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비판도 촛불집회의 저류가 됐다.

이들은 매주 촛불집회 때마다 돌아가며 무대에 올라 한국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세월호 희생자·미수습자와 백남기 농민, 노동 현장에서 쫓겨난 수많은 노동자, 억울하게 희생된 여성들의 공덕이 쌓였기에 촛불집회가 가능했다”고 분석했다.

안진걸 퇴진행동 공동대변인(참여연대 공동사무처장)은 “‘헬조선’을 바꾸자는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촛불집회를 이룬 것”이라며 “탄핵에 그치지 말고 한국 사회를 바꿔나가야 하므로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퇴진행동은 이날 회의를 열어 향후 주말 촛불집회를 계속 이어갈지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 평화집회 문화 정착 계기…빅데이터 인원집계 선례도 남겨

촛불집회는 비폭력·평화집회 문화가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유례없이 많은 인원이 참석해 오랜 기간 이어졌는데도 집회 과정에서 경찰에 연행된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청소년들이나 여성들도 안심하고 나와 참가자가 늘어나는 효과도 톡톡히 봤다.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도 최근 발간한 ‘치안전망 2017’에서 “경찰과 집회 참가자가 상호 신뢰하면서 성숙한 집회문화가 정착돼 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시 등과 협조해 인근 지하철역 이용자 빅데이터 자료를 활용, 과거와 견줘 상대적으로 정확한 참가 인원을 집계한 것도 이번 촛불집회가 남긴 선례가 됐다.

퇴진행동은 자신들이 추산한 집회 참가 인원이 언론이나 시민단체 등의 여론조사 결과에 비춰봐도 상당한 정확성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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