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뺑소니 반드시 잡는다> ‘44일 숨바꼭질’의 최후

<뺑소니 반드시 잡는다> ‘44일 숨바꼭질’의 최후

입력 2016-10-08 10:33
수정 2016-10-0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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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오라기 하나도 단서로…육군 중령 출신 美군무원 검거

단서 조각조각 이어 모아 44일 되던 날 결국 덜미

‘끼이익’ ‘쾅’.

청바지를 입은 한 남성이 은색 승용차 범퍼에 부딪혀 하늘로 튀어 올랐다. 앞유리에 부딪히더니 ‘털썩’ 하고 땅에 떨어졌다.

영하의 날씨였던 올해 1월 10일 서울 서초구 헌릉로의 편도 4차로 도로. 땅거미가 진 이날 오후 7시 30분께 전모(60)씨가 홀로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쓰러졌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횡단보도 대신 맞은편 버스정류장을 향해 무단횡단을 하던 중이었다. 마침 일요일 저녁 시간이라 오가는 차량도 없었다.

내곡IC에서 염곡IC 방면으로 달리다 3차로에서 전씨를 친 이 은색 승용차는 그대로 달아났다. 가족 없이 혼자 살던 전씨는 결국 이렇게 쓸쓸히 비명횡사했다.

◇ 예상 밖 수사 난항…집념의 단서 수집 나선 경찰

경찰은 곧 뺑소니범을 잡을 것이라 자신만만해 하며 수사에 착수했다. 이때만 해도 수사가 길어질 것이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사고 장소 인근에 수배 차량을 잡는 ‘번호판 자동 인식기’(AVNI: Automatic Vehicle Number Identification)가 설치돼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 번호판 판독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고, 경찰은 2월 초 다시 원점에서 폐쇄회로TV(CCTV) 추적을 시작했다.

뺑소니 차량은 달아나기 시작한 뒤 얼마되지 않아 정지 신호에 걸리자 주변 마을로 들어가 배회했고, 주변의 눈을 피하려는 듯 잠시 후 전조등을 끈 채 다시 도로에 나타났다.

서초서 교통범죄수사팀은 수많은 CCTV를 분석하면서 추적을 계속했다. 차분하게, 범인이 도로 위에 흘렸을 흔적을 집념으로 하나하나 찾아나갔다.

전씨를 차량 좌측 앞부분으로 친 까닭에 뺑소니 차량의 전조등은 왼편의 밝기가 반대편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짝짝이’였다는 점도 단서였다.

민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해당 차량이 체어맨이라는 단서도 얻었다.

뺑소니 차량은 서울을 빠져나가 과천까지 유유히 달아났는데, 차량은 과천의 아파트 단지 인근에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CCTV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아무리 아파트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용의 차량의 흔적은 없었다.

◇ 사건 발생 23일째 용의자 특정

경찰은 해당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보유 차량을 검색했고 체어맨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딱 1명이었다.

사건 발생 23일째 되던 2월 1일. 경찰이 비로소 용의자를 특정한 순간이었다.

경찰이 찾은 용의자는 바로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고 미8군 경리단 소속 군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류모(69)씨였다.

경찰은 류씨 집 근처에서 잠복했고, 사건 발생 27일째인 2월 5일 용산에 있는 미군부대로 출근하는 류씨를 은밀히 미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다. 어디에도 그의 체어맨 승용차는 눈에 띄지 않았다. 경찰은 그가 범행을 은폐하려 차량을 숨겨놨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경찰은 류씨가 높은 담이 있는 미군 부대로 들어가자, 부대 맞은편에 있는 한 빌라 옥상에 올라가 부대 안을 굽어 살폈다.

순간 경찰의 눈에 류씨의 은색 체어맨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류씨는 사고 바로 이튿날 부대 인근 공업사에서 차량을 수리하고, 대금 200만원을 모두 현금으로 내곤 부대 안 주차장에 차량을 대 놓았던 것이었다

류씨는 꼬리가 밟힐세라 한국 사법권이 미치지 않는 미군 부대 안에 차량을 보관해 놓고는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

경찰은 법원에 차량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은 미국 영토인 미군부대 안에서의 영장 집행으로 인한 외교 마찰을 우려하며 한 차례 영장을 기각했다.

경찰은 포기하지 않고 부대 내 용산경찰서 미8군 출장소와 협업해 미군 헌병대에서 차량 압수에 대한 상의를 마쳐 법원을 설득할 근거를 얻었다.

다행히 류씨는 내국인 근로자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

◇ ‘우여곡절 끝에’…범행 44일째에 범인 검거

사건 발생 40일째였던 2월 18일, 우여곡절 끝에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됐다.

나흘 뒤 경찰은 류씨를 긴급체포했다. 사건 발생 44일째, 뺑소니범과 경찰 간의 숨바꼭질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압수한 차량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식을 의뢰했다.

여기에서 ‘실오라기’ 하나가 경찰에 더욱 힘을 보태줬다.

국과수의 미세감정 결과 류씨 차량 범퍼 아래쪽에서 푸른색 실오라기 하나가 발견된 것이었다. 전씨가 숨질 때 입고 있던 청바지의 섬유와 일치했다.

하지만 류씨는 경찰 조사에서 “동물이 부딪힌 줄 알았다”면서 한사코 뺑소니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은 공업사에서 확보한 수리 전 류씨 차량 사진도 압박 카드로 활용했다. 금간 차량 앞유리와 깨진 전조등, 찌그러진 보닛 등이 사고 당시의 정황을 드러내고 있었다.

류씨는 말을 바꿔 “곰곰이 생각해보니 사람을 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하지만 한미연합훈련 중이라 내가 구속되거나 경찰 수사를 받으면 훈련에 큰 차질이 빚어질까 봐 훈련 이후에 자수하려 했다”고 궤변을 늘어놨다.

자리를 비우면 한미연합훈련에 중대한 지장을 줄 수 있다던 류씨의 업무는 알고 보니 운전이었다.

◇ 1심서 징역 3년 받았지만 항소심서 집행유예

류씨는 끝까지 온갖 핑계를 대며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경찰은 수사로 밝힌 조각 조각의 사실들을 토대로 같은 달 24일 류씨를 구속했다.

이 과정에서 류씨는 숨진 전씨의 남동생에게 2천500만원을 주고 합의도 했다.

재판에 넘겨진 류씨는 올해 4월 15일 1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지난 6월 30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심은 류씨가 범행을 은폐하는 등 죄질이 나쁘고, 돈을 주고 합의한 유족이 직계혈족이 아니라 생계를 달리하는 형제에 불과한 점 등을 들어 실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무단횡단한 피해자에게도 과실이 있고 류씨가 반성하고 있는 점, 범죄 전력이 없는 점, 유족과 합의한 점 등을 들며 1심 형량은 너무 무겁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경찰이 숨바꼭질을 방불케한 44일간의 수사 끝에 붙잡은 뺑소니범이 범행 173일만에 풀려나는 순간이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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