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다문화가정 청소년의 비극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다문화가정의 한 혼혈 고교 자퇴생이 홧김에 연쇄방화를 저지르다 경찰에 붙잡혔다. 다문화가정에 대한 왜곡된 시선에 괴로워하던 혼혈 청소년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사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서울 광진경찰서는 15일 다문화가정 자녀 정모(17)군을 현조건조물 방화 혐의로 구속했다. 정군과 함께 방화에 가담한 친구 전모(17)군은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군은 지난 3월 3일 오후 11시 55분부터 1시간 동안 서울 광진구 화양동과 자양동 일대 주택가를 돌며 3차례에 걸쳐 폐지 등에 불을 질러 2215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낸 혐의를 받고 있다. 정군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며 화양동의 한 주택가에 불을 질렀다. 소방차가 출동하자 그는 주변에서 진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정군은 다시 2㎞쯤 떨어진 자양동의 한 주택가에서 불을 질렀다. 지난 2월 3일 오전 1시 30분쯤 구의동 주택가의 폐지더미 화재도 정군 소행으로 밝혀졌다.
그런가 하면 지난 1월 15일 오후 5시쯤에는 전군과 함께 모교인 K중학교 건물에 화염병을 던져 5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냈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영화 ‘괴물’의 화염병 던지는 장면을 재연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정군은 1995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에 유학 중이던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한 살 터울의 동생도 태어났다. 하지만 정군의 아버지가 현지에서 돌연사하면서 불행이 시작됐다. 정군과 동생은 엄마를 러시아에 두고 조부모를 따라 한국으로 왔다. 두살 때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정군은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다. ‘튀기’ ‘러샤’ ‘헬로우 러샤’ 등으로 놀림을 당했다. 인종 차별적 놀림 속에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정군의 내면에는 불만과 반감이 쌓여 갔다. 엄마는 딱 한번 전화를 한 이후 아예 연락이 끊겼다. 그는 엄마 이름조차 몰랐다. 사춘기에 들면서 그는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중2 때 정신과 치료를 받느라 결국 학교를 자퇴했다. 졸업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놀림은 이어졌다. 결국 1학년 때 고교를 자퇴한 뒤 가출했다. 지난해 6월에는 그를 찾으러 나선 할머니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동생마저 절도 등으로 소년원에 갇혔다. “너 때문에 할미가 죽었다.”며 꾸짖는 할아버지가 싫어 다시 집을 나와 노숙생활을 했다.
경찰에서 그는 “할머니가 숨진 데 대한 자책감에다 세상이 원망스러워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한국피해자지원협회(KOVA)와 연계해 정군에 대한 심리상담을 실시하기로 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11 현재 국내에는 정군처럼 부모 한쪽이 외국인인 아동·청소년이 12만 6317명이나 된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2012-05-16 1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