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전경.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 증각대사 홍척이 창건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다. 큰법당인 보광전 앞에 한쌍의 삼층석탑이 세워졌다.
실상사 동구 해탈교에서 바라본 만수천. 만수천은 노고단에서 발원하여 달궁계곡을 거쳐 실상사를 지난다. 이후 남강으로 흘러들어 낙동강과 합류한다.
양대박장군 부자충의문. 임진전쟁 당시 의병을 일으킨 양대박과 7000석의 군량미를 의병군에 내준 그의 아들 양경우의 충절을 기려 고향마을인 남원 주생면 상동리에 세워졌다.
충장공 양대박장군 운암승전비. 양대박이 부장(副長)을 맡은 의병이 왜군에 대승을 거둔 임실 운암에 세워졌다.
양대박이 지리산 유람 도중 들른 백장암. 새로 지은 대웅전과 고색창연한 삼층석탑 및 석등이 세월을 뛰어넘어 자연스러워 보인다. 아름다운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됐다.
청계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유람이다. ‘금강산 기행록’과 30편의 한시를 남긴데 이어 모두 네 차례 지리산을 유람한다. 특히 선조 19년(1586) 가을에는 운봉과 황산, 인월, 백장사를 거쳐 실상사와 군자사, 용유담을 지나 천왕봉에 오르는 11일동안의 본격적인 지리산행에 나선다. 친구인 춘간 오적과 삼촌인 양길보에 소리꾼 애춘과 아쟁을 타고 피리를 부는 수개와 생이도 동행했다. 이 때 남긴 것이 ‘두류산 기행록’과 13편의 한시다. ‘폐허가 된 실상사 옛터’(實相寺廢基)도 이 가운데 하나다. 실상사는 양대박의 지리산 유람에 중요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흥하고 망함은 한결같이 참 사유의 지침이요
밝고 어두움은 천 겁 세월의 먼지이네
용천(龍天)들도 또한 사라져 없어지고
금지(金地)는 이미 잡목 숲이 되었네
돌이끼 무성한 비석에는 글자 하나 남아있지 않고
산은 텅 비었는데 불상만 덩그라니 앉아 있네
흐르는 시내 다정도 할사
울며불며 가는 길손 전송하네.
실상사 철조여래좌상(문화재청 사진)
양대박을 두고 왜 뛰어난 시인이라고 평가하는지는 이 시를 읽으며 실상사에 가보면 누구나 실감할 수 있다. 길손을 전송하던 실상사 동구의 시내는 청계의 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불타버린 절집에 외롭게 앉아있던 철불은 이제 실상사를 상징하는 존재나 다름없다.
글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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