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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이 만난 사람] 자서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펴낸 현역 최고령 발레리나 강수진

[김문이 만난 사람] 자서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펴낸 현역 최고령 발레리나 강수진

입력 2013-01-31 00:00
업데이트 2013-01-3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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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지고 찢어진 두 발…아물지 않은 상처가 저를 키웠어요

‘블랙 스완’(Black Swan)이라는 말이 있다. 도저히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상상할 수 없는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것을 뜻한다. 통념에 빠져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함을 뜻하는 경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자. 연약하면서도 순수하다. 우아한 연기는 단연 일품이다. 백조와 흑조, 둘 다 넘나들면서 열정적인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감춰진 어두운 면을 서서히 표출해 내는 카리스마와 관능미는 더욱 그렇다. 영화 ‘블랙 스완’은 2년 전 한국에서 개봉됐다. 여기에서 주인공인 발레리나 내털리 포트먼은 온갖 어려움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다.

지난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강수진이 자신의 발레 인생을 잠시 회고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지난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강수진이 자신의 발레 인생을 잠시 회고하면서 활짝 웃고 있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이제 현실로 돌아온다. 맑은 영혼으로 춤을 춘다. 무한한 열정으로 몸부림을 친다. 스무 살 때는 서른을, 서른 때는 마흔을 꿈꾸는 백조였다. 어릴 적 땅만 쳐다보던 수줍은 ‘땅바라기’가 나중에 하늘을 나는 백조가 됐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블랙 스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읊었다.

‘나는 매일 열정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낸다. 오늘, 바로 이 순간 당신의 모든 것을 불태워라. 열정의 크기가 인생의 크기를 결정한다. 열정을 잃었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세계 최고령 발레리나’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처음 시작하는 것처럼 ‘최연소 발레리나’이기도 하다. 세계적 명성을 얻은 독일 슈투트가르트 수석 발레리나 강수진(46). 자서전 ‘나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출간과 평창동계올림픽 홍보대사 위촉식 참석차 일시 귀국한 그를 지난 29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메리어트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베이지색 원피스 차림에 진주 목걸이가 잘 어울린다. 연한 화장에다 밝게 웃는 모습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20대 여성이 가장 존경하는 여성 1위’라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지난 19일 1년 만에 귀국해 다음 달 2일 한국을 떠날 예정이다. 짧은 일정이어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무척 바쁘게 보내는 중이라며 자리에 앉는다. 먼저 자서전 얘기부터. 책을 낸 동기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인생을 90으로 치면 딱 반이 지났습니다. 뭔가 중간 점검을 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년 전 한국에 강의하러 왔다가 믿을 만한 출판사에서 책을 출간해 보자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제의가 있었지만 아직은 아니다 싶어 미루어 오던 중 이번에 책을 내게 됐지요.”



그는 지난 27일 서울 강남 교보문고에서 팬 사인회를 통해 국내 팬들과 직접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이에 대한 소감을 물었더니 “(팬들의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책을 통해서 그들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면서 “어느 나라를 가든 사랑해 주는 팬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니냐”며 웃는다. 원하는 팬들이 있다면 나중에 영문판도 한번 내 볼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는 11살 때 발레를 시작했으니 올해로 발레 인생 35년을 맞는다. 그동안 좌절과 수많은 고통을 겪었다. 이런 그의 삶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소개되면서 감동을 주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32살이 되던 1999년 어느 날 의사에게서 “계속 연습을 하면 평생 발레를 못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였다고 회고한다. 그해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춘희’를 발레로 재해석한 ‘카멜리아 레이디’라는 작품으로 동양인 최초로 ‘브누아 드 라 당스’(춤의 영예)를 수상할 만큼 한창 전성기 때여서 충격은 더 컸다. 병명은 정강이뼈 스트레스성 골절이었다. 주위에서 발레를 포기하라고 했지만, 그는 ‘잠시 내려놓는다’는 생각으로 힘겨운 재활을 견디었고, 열정의 날개를 달고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만약’이라는 단어와 ‘내일’, 그리고 ‘포기’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 이런 상황이 오면 ‘오늘 이 순간을 불태우는 열정과 영혼만이 있을 뿐이다’고 되뇌면서 자신을 추스른다. 지금도 무대에 설 때면 이런 심정으로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가장 잊지 못하는 무대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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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진
강수진


“굳이 꼽으라면 1985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로잔 국제 발레 콩쿠르 최종 결승 때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원래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데 그때는 처음으로 로잔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개최됐습니다. 1등 상을 받았고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 됐지요. 세계가 주목한 무대였습니다.”

이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어떤 것이냐고 묻자 “스토리 있는 발레를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춘희’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잠시 영화 ‘블랙 스완’ 얘기가 나오자 주인공 내털리 포트먼의 연기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블랙 스완’처럼 자신의 삶을 영화화하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아직 그런 제의가 없으니 모르겠다”며 웃어넘긴다. 세계적인 무용수로 성공한 비결을 물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니 성공은 결코 운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에 몸이 찢겨 나가도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들의 시린 상처를 들춰 보면 거기에 답이 있다’고 얘기하고 싶군요. 까지고 부러지고 찢어진 제 두 발, 30년 동안 아물지 않은 그 상처가 저를 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와 성공의 과정은 그의 발(작은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관절 마디마디가 불거지고 뼈와 근육만 도드라지게 드러난 그의 발은 2001년 ‘성공시대’라는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공개돼 많은 화제를 뿌렸다.

원래 그는 한국무용을 시작했으나 중학생이 되면서 어머니의 권유로 발레로 방향을 틀었다. 때마침 학교에서 멘토이자 스승인 캐서린 베스트 선생을 만나면서 발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1981년 3월 선화예술학교는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교장인 마리카 베소브라소바 선생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이때 베소브라소바 선생은 우연히 강수진을 발견하고 유학을 권유했다. 망설이는 그의 어머니에게 “수진은 10만명의 발레리나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아이입니다. 분명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성장할 겁니다. 그러니 믿고 제게 보내 주세요”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15살 나이에 홀로 유학길에 올랐다.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 시절을 잠시 회고한다.

“불어는커녕 영어도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연습뿐이었지요. 하지만 밤 9시가 되면 모든 불을 꺼야 하는 까다로운 규칙 때문에 연습도 맘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도둑연습’이었습니다. 다들 잠든 사이에 몰래 기숙사에서 빠져나와 스튜디오에서 달빛을 조명 삼아 수업시간에 배운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도둑연습을 계속했지요. 지금도 연습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절박한 심정으로 연습실을 훔치러 다녔던 당시의 시절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러한 혹독한 연습으로 모나코에 온 지 1년 만에 장학금을 받는 우수한 학생으로 변했다. 이후 뉴욕 무대 등을 거쳐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으로 옮겼다. 여기에서 7년의 군무주자를 거쳐 수석 발레리나로 우뚝 서서 지금까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은 전 세계 수십개국에서 몰려든 무용가들로 단원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프랑스, 중국, 벨기에, 캐나다 등 문화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수석 무용수가 된 이후 그는 공연에 대한 책임감은 물론 언론과의 인터뷰도 중요한 일 중 하나다.

그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터키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다. 그 비결을 물었더니 “벙어리 1년, 귀머거리 1년을 지내면서 살아남기 위해 언어를 치열하고 절박하게 배웠다. 친구, 선생님, 시댁 가족 등과 자주 대화를 하다 보니 빨리 익힐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독일에서의 생활은 어떠할까. 그는 ‘아침 시간은 내 입에 금을 물어다 준다’라는 독일 속담을 인용하면서 말을 이어 나간다.

“새벽 5시쯤 눈을 뜨면 맨 먼저 커피 머신의 전원을 켜고 다음에는 사우나 스위치를 올립니다. 아침 트레이닝과 20분 동안 사우나를 한 뒤 아침 식사를 하고 극장으로 향합니다. 다른 무용수들은 그때부터 옷을 갈아입고 몸을 풀 준비를 하지만 저는 이미 몸이 풀려 있는 상태에서 다른 무용수와 발레단의 아침 트레이닝을 시작하지요.”

그는 이 같은 아침 트레이닝이 자신을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한다. 특히 매일 사우나를 즐긴다. 30년 이상 계속된 강도 높은 연습과 날마다 이어지는 공연 탓에 근육 피로물질을 조금이라도 빨리 몸 밖으로 배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남편은 터키 출신의 무용수 ‘툰치 소크만’이다. 발레단 동료로 만났고 7년 동안 데이트를 하다가 2002년에 결혼했다. 거창하게 결혼식을 올린 것이 아니라 트레이닝이 끝난 어느 날 저녁, 친구 10여명과 저녁 식사를 한 것이 전부였다.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고 하자 “(남편을 잘 만나) 정말 복이 많은 여자”라며 활짝 웃는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에게 발레리나의 정년은 몇살인지를 물었더니 “현역으로 최고령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최연소라는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 앞으로 50세가 되더라도 오늘보다 더 즐겁게 발레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한다.

선임 기자

km@seoul.co.kr

■발레리나 강수진은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79년 선화예술중학교에 입학해 한국 고전무용을 배우다가 발레로 바꿨다. 1982년 1월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로 유학해 1985년까지 공부했다. 그해 스위스 로잔 발레콩쿠르에서 우승해 세계 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6년 세계 5대 발레단인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 입단했다. 1994년 발레단 솔리스트가 됐고 이듬해 수석 발레리나가 됐다. 1999년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인 ‘브누아 드 라 당스’ 최우수 여성무용수상을 받았다. 2007년 독일 최고의 예술가에게 부여하는 ‘장인’의 칭호인 ‘캄머 탠처린’(궁중 무용가)에 선정됐다. 그해 국내에서 국민훈장 석규장을 받았다.

2013-01-3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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