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공기가 따뜻했다. 친구들은 핑크플로이드 보러 간다고 자랑하는 내게 록 콘서트에서는 의상이 중요하다고 일러주었다. 그래서 차려입었다. 록은 역시 가죽이라는 생각에 가죽점퍼를 입고 싶었지만 더워서 포기하고, 대신 가죽이나 금속이나 망사가 조금이라도 붙어 있다 싶은 건 몽땅 몸에 가져다 걸쳤다. 아이라인도 진하게 그려넣었다. 동료들은 그러고 나온 나를 보더니 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가려면 힘이 들 테니 혼자 택시를 타고 오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그날 공연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여성 코러스가 멋있었다는 것, 로저 워터스의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는 것, 우리는 무척 신 나게 놀았다는 것 정도이다.
며칠 뒤 집에 갔다. 심심해서 읽을 만한 책을 찾으려고 아버지 책상과 책장을 뒤지는데, 유리판 아래에 핑크플로이드 콘서트 표가 곱게 끼워져 있었다. 돈 주고 산 VIP석 입장권이었다. 응? 육십 넘은 부부만 사는 집에 이게 왜? “엄마, 콘서트 갔었어요?” “아니? 맞다, 아빠가 며칠 전에 어디 갔다 오는 것 같긴 하더라.” “아빠가? 아빠가 왜?”
뜻밖이었다. 어릴 적부터 오래된 LP 음반들이 굴러다니긴 했어도 내가 아는 아버지는 구태여 외국 가수의 콘서트장을 찾을 정도로 열정적인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랬다. 핑크플로이드가 한참 활동할 1970년대였다면 아버지도 젊은 사람이었다. 그렇게까지 젊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정도였을 것이다.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던 아빠에게 갔다. “아빠, 혹시 핑크플로이드 콘서트… 가셨더랬어요?” “응.” “어디 계셨어요? 저도 있었는데 전화하지 그랬어요.” “어… 잠깐 서 있다가 사람도 많고 쑥스럽기도 해서 금방 돌아왔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딸이 성인이 된 이후로 대화라고는 밥상 앞에서 “나이 들어도 자기계발을 열심히 해야 한다” “네” 정도가 전부였던 부녀가 종합운동장에서 조우했더라도, 반갑기보다 어색해서 몸 둘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헤어졌을 터이다.
이듬해 봄볕이 들기 전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몇 달 전부터 폐가 안 좋아져 힘들어하시긴 했지만 갑자기 쓰러지신 뒤 열흘 만에 가버린 아버지와의 이별이 황망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신없이 상을 치르고 가까스로 몸과 마음을 추스른 뒤 문득 나에게 떠오른 건 함께 있었으면서도 만나지 못했던 콘서트의 기억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계셨을까.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내가 환호를 보낼 때 아버지도 그러셨을까. 왜 나는 그날 우리가 함께 보았던 것, 우리가 함께 느꼈던 것에 대해서 좀 더 말하지 못했을까.
아버지는 세 자매 중에 막내인 내가 아들이기를 바랐다고 했다. 마지막 카드라고 생각했던 막내가 딸이어서 실망도 많이 하셨다지만 늦둥이가 으레 그렇듯 나는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면서 당연하다는 듯, 특별한 계기도 없이 아버지와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다. 일제가 몰락할 무렵 태어나 한국전쟁, 독재와 고도성장을 겪으며 살아온 아버지의 삶이 궁금한 적도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아버지와 곰살맞은 대화를 나눈다는 게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날은 깃털처럼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작은 티켓 한 장에 대한 이야기도 그렇게 묻어둔 채 아버지는 떠났다. 더 이상 아버지에게 말 걸 수 없게 된 나는 따뜻했던 4월의 그 밤, 아버지와 내가 한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누군가 멀리서 객석을 잡은 카메라 앵글에 아버지와 내가 같이 들어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빠와 손을 잡고 카메라 앞에 섰던 적이 언제였을까. 서툴게 꾸미고 나섰던 그날, 나는 평소보다 예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가 우리가 함께 담긴 그날의 사진을 보았다면 누구보다 예쁜 늦둥이 막내딸이라고 자랑스러워했으리라 믿고 싶다. 나는 아빠에게 귀여운 막둥이로, 아빠는 나에게 멋지고 열정적인 사나이로, 서로에게 빛나는 한순간이 되었으리라 믿고 싶다.
김은경_ 늦은 나이에 씩씩한 아들을 낳아 기르며 부모의 심정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잘생긴 아들이지만, 유치원생 얼굴 크기가 초등학생만 한 것이 유일한 고민이라고 합니다.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