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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골목 여행]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구석구석 골목 여행]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입력 2012-05-20 00:00
업데이트 2012-05-2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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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구석 골목 여행 ?? 전주 완산구 한옥마을-동·서완산동 골목길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기억 속으로는 걸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기억을 간직한 길은 걸을 수 있다. 특히 골목은, 기억력이 좋다. 600년 역사를 품고, 그 세월이 남긴 말씨와 기왓장, 손맛을 잊지 않는다. 그뿐이랴. 숱한 철수와 영희가 울고 웃던 놀이터를 기억하고, 어느 연인이 그 앞에서 입맞춤을 나눴던 칠 바랜 철제 대문도 알고 있다. 기억을 간직한 골목에 섰다. 전주 완산구의 서로 다른 분위기의 골목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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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 골목> 한옥이 살아있다

앉은 모양새가 단정하다. 얼핏 봐도 반듯한 인상이다. 풍모는 탕탕하고, 호연하다. 바르게 얹어진 기왓장, 공간을 풍부하게 만드는 마당과 댓돌, 자연에 어깨를 기댄 담과 기단까지. 한옥에는 몸짓과 표정이 어려 있다. 한옥마을 골목(전주 완산구 교동)을 걸었다.

전주 한옥마을은 700여 채의 한옥이 빼곡히 군락을 이룬 전국 유일의 도시한옥군이다. 처음 마을이 조성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일본인의 세력 확장에 반발하던 전주 사람들이 이 일대에 한옥을 짓고 모여 살던 것이 자연스레 마을을 이뤘다. 이후 1977년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며 규제에 묶이기도 했지만, 2002년 전주의 정체성을 살린 관광자원으로 탈바꿈하며 지금의 면모를 갖췄다. 이제는 명실상부, 전주여행 1번지다.

‘전동성당(사적 제288호)’에서 걷기 시작한다.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전동성당은 프랑스 신부가 설계하고, 중국인이 구운 벽돌을 사용해, 한국인이 올리며 공을 들인 건물이다. 그 덕에 100여 년이 흐른 지금은 우리나라 성당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힌다. 영화 ‘약속’에서 박신양과 전도연이 눈물의 결혼식을 치른 후로는 더욱 유명해졌다. 미사가 없는 틈에 들어가 본 내부는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성당은 그저 평화로운 시간을 내어줄 뿐 아무 말이 없었지만, 오랜 세월 경건한 기도가 모인 장소답게 좋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장소에는 특유의 힘이 있다.

성당을 마주한 ‘경기전(사적 제399호)’은 위엄 있는 모습이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 보물 제 931호)을 보존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하지만 내부에는 모사본이 전시돼 있어, 많은 전주시민이 진본을 제자리에 보관하기를 바란다. 진본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의외의 곳에서 달랠 수 있다. 경기전 입구에서 ‘내기 장기(바둑)’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그 주인공이다. 매일 완산동, 다가동, 평화동 일대에서 60대 이상 노인분들이 술, 담배, 커피를 걸고 내기 장기를 한다. 3년 전부터는 인근 구둣방 아저씨가 아예 의자와 장기판까지 마련하면서 판이 더 커졌다는 후문이다. 동전만 한 장기알에 고민하는 모습이 재밌어 훈수 한마디 거들려 하자, 대번에 손사래를 치신다. “어이~에~에. 애덜이랑은 안 해, 저리 가.” 어쩐지 억울해서, 배가 고파진다.

35년 전통의 ‘베테랑 칼국수(063-285-9898, 5천 원)’로 향했다. 직접 뽑은 얇은 면발, 계란을 잔뜩 푼 국물, 듬뿍 얹은 들깨가루와 김 가루 고명까지, 침이 고인다. 베테랑 칼국수는 전주시민들이 즐겨 찾는 분식집이다. 들깨가 만드는 걸쭉한 국물맛과 고소한 냄새가 일품이다. 거기에 적당히 익은 깍두기를 곁들이니, 한 그릇이 금방이다. 사리 추가는 공짜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경기전길을 거닐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곳이 하나 있다. 야전(야외전축)이며 풍로, 구슬과 딱지, 복수혈전 포스터에 간첩신고 푯말이 붙은 카페 ‘구멍가게(010-4131-3206, 음료 3천 원)’다. 화가 곽승호 씨가 운영하는 곳인데, ‘추억박물관’으로도 불린다. 쌍화탕과 고구마라떼가 주인장 추천 메뉴다. 조선왕조 500년의 흥망을 함께한 600살 은행나무도 놓칠 수 없는 명물이다. 2005년 나무 밑동에서 새끼나무가 자라는 길조가 나타난 이후 ‘회춘 나무’로 인기몰이 중이다. 나무 아래서 심호흡을 다섯 번 하면 나무의 정기를 받는다는 말에 팔을 젖히고 숨을 내쉰다. “흐읍, 푸우. 흐읍, 솨아.”

골목은 느린 걸음으로 걸어야 제맛이다. 생각 없이 걷다가 대문을 만나면 들어가보고, 복잡하게 이어지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돌아 나온다. 그렇게 돌다 보면 어느새 처음 그 자리에 서 있게 된다. 골목을 닮은 한옥도 일직선이 아니다. 숨을 곳도 흔하고 도망칠 구멍도 많다. 돌고 도는 것, 순환한다는 것,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일 테다.



<동·서완산동 골목> 길 따라 세월 따라, 자박자박 오목조목

삐걱거리는 미닫이문과 낡은 간판이 ‘춘추슈퍼’의 춘추(春秋)가 지났음을 알리고, 동전 몇 개를 집어삼키고도 여간해서 돌지 않는 뽑기통이 ‘완산문구사’의 고단함을 짐작케 한다.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1980년 어느 날에 멈춰선 전주를 만났다. 동·서완산동이다.

동·서완산동은 재미있는 곳이다. 두 마을이 완산칠봉(해발 163m)의 품에 안긴 모양새인데, 능선 경사면을 따라 위태롭게 들어앉은 집과 평지에 평온하게 들어선 집이 나란히 이어진다. 1970~1980년대 양옥과 도시형 한옥이 어우러진 가운데, 옛 한옥이 근엄하게 들어서 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집단으로 거주했던 탓에 일본식 집도 남아 있다. 벽화가 그려진 담도 꽤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 휘어짐과 꺾임 등 다양한 골목의 전형이다.

구멍가게와 철물점, 쌀가게, 미용실, 정육점, 통닭집, 목욕탕은 옛날 스타일 글씨체와 벗겨진 페인트칠을 고수하고 있다. 촌스럽대도 무리는 아니다. 점집도 많다. 아무래도 점집과 철학관은 집값이 제일 싼 동네로 모이기 마련이다. 한 집 건너 붉은 깃발이 나부낀다. 자칫 을씨년스럽기 쉬운데, 동네 분위기는 깔끔한 편이다. 폐타이어 화분에 파를 심는 할머니와, 스러진 이웃집 터를 밭으로 일구는 아저씨의 공이 크다. 분주함과 살뜰함이 녹아 있다.

한때 부유했지만 변두리 동네로 밀려난 동완산동, 해방 이후 달동네가 돼버린 서완산동. 닮았지만 다른 이곳에 얼마나 많은 이가 머물고, 또 떠났을까. 못 챙긴 이삿짐 같은 그 숱한 기억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가 골목을 찾는 이유가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드문드문, 하지만 아름다운 저편의 기억이 그립고 그리워서.

글·사진 송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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