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입력 2012-04-22 00:00
수정 2012-04-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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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와 달리 예능 프로그램은 대본대로 촬영되는 일이 드뭅니다. 심지어 대본이 없고 출연자와 순서만 적힌 큐시트라는 게 전부인 경우도 있습니다. 재주 많은 예능인들은 순발력으로 무장하고 녹화장에 전사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다 보니 예측 못한 상황이나 말이 종종 전파를 탑니다. 대부분 웃음을 주려고 하는 언행이지만 때때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금언(金言)도 나옵니다. 재미를 넘어서는 감동이 그럴 때 나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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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수다>에서 진행을 맡은 윤종신이 후배 가수 테이에게 위로 삼아 던진 말도 그랬습니다. “네가 떨어진 건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반응의 차이일 뿐이야.” 김범수나 박정현처럼 7라운드까지 버텨서 명예졸업을 하고 싶었겠지만 불과 1라운드에서 ‘꼴찌’로 탈락한 테이의 표정은 심히 우울했습니다. 매니저 역을 맡은 개그맨 김태현이 “미련은 남겠지만 후회는 하지 말자”며 등을 두드리는 장면도 나왔지만 테이의 참담한 표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뭐 그깟 일로 그래’라고 하기엔 가수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억울하겠죠. 열심히 준비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불렀는데 꼴찌라니. 하지만 말이 꼴찌일 뿐 테이는 사실 7등이었습니다. 내로라하는 가창력의 소유자들 중 7위를 한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에 아무나 나옵니까. 자랑스럽지 않을지언정 부끄러울 일은 결코 아니죠. 그런데도 테이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관중평가단에 대한 배신감이 복합된 감정이었을 겁니다.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설령 실력이 모자랐다고 해도 그게 비난 받을 일은 아닐 겁니다. 실력이 부족한 줄 안다는 게 중요한 일이고 그때부터 다시 실력을 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좋은 일입니다. 출연을 결심했을 때 테이는 설마 자신이 관객들로부터 가장 낮은 평가를 받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겸손이 묻어나왔지만 자신감 넘치던 인터뷰가 경연 전에 나왔으니까요.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 모인 관객은 냉정했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관객의 반응이 냉정했던 거죠.

아예 다르게 생각해봅니다. 반응의 차이가 바로 실력의 차이라고 말이죠. 실력이란 실적과 동의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력은 결과로 보여준다는 거죠. 그러려면 선수는 링에 올라 상대의 무릎을 꿇려야 하고 영업사원은 물건을 잘 팔아야 하고 가수는 노래를 열심히 불러서 관객의 박수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왜 안 알아주지’ 하며 세상을 원망한다면 결코 전문가라는 인증을 받아낼 수 없다는 거죠.

4월은 국회의원 선거의 달입니다. 선거에 나가는 후보자는 유권자의 반응에 일희일비합니다. 그러나 예측조사가 어떻고 출구조사가 어떻고 해도 최종결과가 나오면 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은퇴하지 않는다면 다음 선거를 대비해야죠. 배우나 가수에게는 관객이 유권자입니다. 유권자의 수준이나 의식을 문제 삼는다면 애당초 무대에 오르지 말아야 합니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자신의 뜻대로 밀고 나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멋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 그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자신을 아는 겁니다. 주관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거죠. 테이는 2회전 진출에 실패했지만 자신을 더 아는 데 성공한 겁니다. 아마도 다음 무대에선 한결 성숙한 모습으로 노래하겠죠. 과거의 실패(?)를 웃으며 얘기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우리 동네 술집에 가서 소주를 주문하면 종업원이 이렇게 묻습니다. “처음처럼 드려요?” 특정상표를 이야기해서 조심스럽지만 그 말이 참 정겹습니다. 저는 그 말에 하나 더 추가해서 격언으로 삼고 싶습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처음 먹었던 그 마음으로 살되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산다면 모든 일에 감사하지 않을까요? 테이도 가수로 데뷔할 때 먹었던 그 마음을 이번에 다시 부둥켜안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에 음반 한 장 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리고 <나는 가수다> 무대에 서기가 또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사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도 중요하지만 ‘지금부터’는 더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자의 삶에서 ‘미래’와 비슷한 말이 무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불안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도전이라고 합니다. 저는 희망이라고 하겠습니다. 테이를 만나면 ‘미래가 밝습니다’라고 말해줄 겁니다. 희망이 있다는 거죠. 이번에 바닥을 겪었으니 이제부턴 튀어오를 일밖에 없다고요.

주철환 _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소한 일과 풍경에서 교훈을 포착하는 날카로운 마음의 눈과 남다른 ‘감동 탐지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어교사에서 PD로, 다시 교수에서 방송사 사장으로 변신을 거듭했고, 현재는 중앙미디어네트워크의 편성본부장을 맡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는, 친절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행운도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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