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젤리’ 이끄는 배우 손현주, 나눔이 아니라 ‘채움’입니다.

‘에반젤리’ 이끄는 배우 손현주, 나눔이 아니라 ‘채움’입니다.

입력 2011-08-14 00:00
업데이트 2011-08-14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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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도 미워할 수 없는 남자가 있다. 아픈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워도(드라마 <장밋빛 인생>), 이혼한 전처와 새 여자 사이에서 갈등을 해도(드라마 <이웃집 웬수>), 설사 킬러라 해도(<드라마 스페셜> ‘완벽한 스파이’). 올 상반기에만 세 편의 단막극에 출연하며 강행군을 마친 배우 손현주 씨(47세)를 여름이 오는 길목, KBS별관 앞 카페에서 만났다. 그를 만난 뒤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아니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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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이 아니라 ‘채움’입니다

그에게는 배우 말고도 다른 직함이 하나 더 있다. 국내 최초의 장애아 합창단 ‘에반젤리’ 대표. 2005년 20명 남짓으로 시작한 ‘에반젤리’는 장애청소년문화아카데미로 성장했고, 작년에는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등록되었다. 그는 이름만 걸어놓은 대표가 아니라, 시작부터 함께한 창립 멤버다. 2003년 드라마 <러브레터>에 신부(神父)로 출연하며 자문을 맡았던 홍창진 신부와 처음 만났다. 술 좋아하고 산 좋아하는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까워졌다. 천주교 신부와 개신교 집사(담배도 피우고 이것저것 다한다 하여 그는 ‘잡사’라 부른다)가 만났는데 음주가무가 전부일 순 없는 법. 의기투합해 만든 것이 바로 ‘에반젤리’다. 부모 말고는 누구와 소통해본 적도 없고, 음표도 모르고 악보도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만나 노래 연습을 시작했다.

“한 곡을 부르기 위해서 3개월, 길게는 6개월이 걸려요.”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화음은 듣는 이의 귀가 아닌 마음을 움직인다. “되게 예뻐요. 방긋방긋 웃으며 노래를 부르는데 듣는 사람은 눈물이 나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달라졌다. 눈을 맞추고, 웃고, 말을 걸기 시작했다. 기쁨이 커질수록 고민도 커져갔다. 단원 수는 70~80명으로 늘었고, 벌써 스무 살이 된 아이도 있다. “이제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어떻게 이 아이들의 미래를 열어줘야 할지 고민이 많아요.”처음에는 자신의 출연료 중 일부를 기부하거나 일일호프를 여는 것으로 운영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규모가 커지면서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지인들이 골프대회 등의 이벤트를 개최하면 자선행사로 유도하고, 자신이 도움을 준 단체에 후원을 부탁하기도 한다.

“신부님하고 저는 그걸 앵벌이라고 불러요.”(웃음) 가방에도 늘 후원용지를 넣고 다닌다. 촬영 스케줄만으로도 바쁠 텐데 어떻게 나눔을 이어갈 수 있는지 물으니, 나누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라 말한다. “제가 왜 눈물을 흘렸겠어요? (그 아이들이) 제 아픈 곳을 만져주고 빈 곳을 채워주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 채워짐이 없었다면 살아왔던 길을 돌아보지 못했을 거예요.” 얼마 전 그가 청산도 슬로시티걷기축제 CF출연료를 전액 ‘에반젤리’에 기부하는 것을 본 완도군청 직원 50여 명이 그의 ‘채움’ 활동에 동참했다. “후원용지 사십몇 장을 받아서 올라오는데, 너무 고맙고 뿌듯하더라고요.” 그의 채움 바이러스가 퍼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채우다 보면 그로 인해 채워지는 사람이 생기고, 또 채움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누군가를 채워주고… 그보다 더 좋은 건 없죠.” 그는 채움의 행복한 선순환을 꿈꾼다.

인생은 둘래길이다

그렇게 바빠 좋아하는 산에는 언제 가느냐고 물으니, 다 방법이 있단다. “촬영을 가거나 ‘앵벌이’를 가거나 어딜 가든 산이 있어요.” 그가 등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등정보다 등로(登路)다. “얼마나 높게 올라가느냐보다는 어떤 길을 택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고 내려오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생도 마찬가지다. “20년 방송 생활을 하면서 한 번도 어딜 올라가 봐야겠다 생각한 적이 없어요. 연기에 정도가 어딨고 정점이 어딨어요?” 올라간 적이 없으니 당연히 내려갈까 불안해본 적도 없단다.

“요즘 올라가는 길을 얘기해주는 곳은 많아요. 하지만 내려오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마음은 공허한데 감수성은 예민하고… 그러니까 자꾸 숨게 된다고요.” 그는 같은 길을 가는 후배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산을 빨리 오르려 하면 보이는 건 앞사람 엉덩이뿐이다. 하지만 길을 걷는 이 순간에 의미를 두면 새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느껴지고, 함께 걷는 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 어쩌면 그가 채움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높이, 빨리 오르는 길이 아니라 더불어 걷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 아닐까?

글 이미현 기자, 사진 한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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