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서 온 편지] 손으로 편지를 쓰고 받는 큰 즐거움

[지리산에서 온 편지] 손으로 편지를 쓰고 받는 큰 즐거움

입력 2011-08-14 00:00
업데이트 2011-08-1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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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골부부가 내는 ‘더덕퀴즈’를 아세요?

내가 운영하고 있는 <하늘 땅 여행> 카페(http://

cafe.daum.net/skyearthtour)에 ‘더덕퀴즈’를 낸 지 오늘로 일주일이 되었다. 나는 퀴즈를 마감하고 회원들에게 상품으로 《삶과꿈》이란 잡지를 우체국에 부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나는 《삶과꿈》에 <둘만 떠나는 여행>이란 타이틀로 세계일주 여행기를 15개월째 연재하고 있다. 처음에는 책을 내기 위해 출판사 측에 접촉을 시도했는데, 《삶과꿈》 편집부에서 우선 잡지에 연재를 시작해 보자고 제안했다. 해서 아내와 단 둘이서 배낭을 메고 세계일주 여행을 했던 알콩달콩한 내용을 담아서 지금까지 연재하고 있다. 하기야 잘 팔리는 인기작가의 책은 경쟁적으로 출판을 유치하겠지만, 나 같은 무명 여행 작가의 책은 수지가 맞지 않아 출판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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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삶과꿈》을 받아보는 즐거움

매월 원고를 보내면 잡지사에서는 나에게 세 권의 잡지를 보내준다. 매월 한 달에 한 번씩 배달되는 《삶과꿈》을 받아보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큰 즐거움이다. 깊은 산골에서 우편물을 받아보는 것은 남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적적한 산골에 살다보니 집배원 아저씨만 보아도 괜히 반갑고, 혹 나에게 온 우편물은 없을까 하고 마음이 설레게 된다. 우리 집 앞으로는 작은 신작로가 백운산 아래 만수마을로 나 있는데,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하루에 두 번 농어촌버스가 지나간다. 그리고 집배원 아저씨가 하루에 한 번씩 꼭 지나간다.

“OOO 씨 편지요!” 집배원 아저씨가 지날 때에는 나는 이 소리가 들리기를 은근히 기대해 본다. 그러나 붉은 오토바이가 멈추지 않고 휙 지나가 버리면 괜히 서운한 감정이 들곤 한다.

‘더덕퀴즈’는 우리 부부가 산에 가서 나물을 뜯다가 발견한 더덕을 사진으로 찍어 잎만 공개하여 식물이름을 알아맞힌 회원에게 내 여행기가 연재되고 있는 《삶과꿈》을 선물로 주는 것이다. 물론 이미 지나간 과월호이지만, 그냥 집에 묵혀두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 심심풀이로 퀴즈를 내서 맞힌 사람에게 보내주기로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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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첨자에게 간단한 내용을 담은 엽서 한 장씩을 써서 잡지 속에 넣고, 봉투에 발신인과 수취인의 주소 성명을 육필로 써서 끈이 달린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냥 잡지만 달랑 받는 것보다는 그래도 육필로 쓴 엽서 한 장을 넣으면 받아본 사람이 그 엽서를 읽으며 덜 허전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간전우체국은 수평리 우리 마을에서 약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더운 날씨에 걸어서 가기에는 좀 힘들고, 그렇다고 자동차를 타고 가기에는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간전면사무소를 갈 때에는 가급적 자전거를 타고 간다. 이 자전거도 서울에 있는 친구가 쓰던 것을 준 것이다. 비록 고물 자전거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유용한 교통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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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가방에 넣어서 어깨에 메고 나는 우체국을 향해 페달을 서서히 밟았다. 수평리에서 면사무소까지는 제법 너른 들판이 가로 놓여 있다. 들에는 트랙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초를 베어내고 있었다. 논에는 못자리를 할 벼 묘목이 바둑판처럼 파릇파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저 건초를 베어내고 나면 바야흐로 바쁜 모내기철이 다가온다. 그러나 농사도 이제 예전 같지가 않다. 논밭 골골마다 실개천이 휘돌아 내리고 모를 심는 일에서부터 수확을 하기까지 거의 모든 일을 기계가 해내고 있다. 사람은 벼가 자라나는 상태를 살펴보고, 물의 정도, 농약을 치는 일 등 관리에 대한 판단을 내려줄 뿐이다.

쭉 뻗은 농로를 자전거로 십여 분을 달려가면 곧 바로 간전우체국에 닿는다. 우체국 앞에는 빨강색의 집배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역시 빨강색의 우체통, 제비가 그려진 간판이 보인다. 나는 저 빨간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우체통만 보아도 왠지 어떤 ‘그리움’과 ‘기다림’이 몰려온다.

시골 우체국은 매우 한가롭다. 우체국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은 나 혼자뿐이고 여직원 두 사람이 뱅크 대에 앉아 있다. 나는 육필로 쓴 엽서를 잡지 사이에 끼어 넣고 우편번호를 기재해서 여직원에게 넘겨주었다.

우체국을 나와 다시 자전거를 타고 들판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오는데 괜히 기분이 좋다. 왜 그럴까? 그것은 편지를 쓰는 즐거움과 부치는 즐거움, 그리고 내 편지를 받아보고 즐거워 할 상대방의 표정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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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중에 부친 엽서는 생생한 여행일기가 된다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아내 덕분에 여행을 꽤나 많이 한 편이다. 그것은 아내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는 그 어떤 약보다도 ‘여행’이란 묘약이 묘한 기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팔불출처럼 직장도 팽개치고 사는 집의 평수를 줄여가면서까지 아내와 단 둘이서 배낭 하나 걸머지고 지구촌 오지를 꽤나 쏘다녔다. 그 덕택인지 아내는 아직도 내 곁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고, 나도 섬진강 변으로 귀농을 해서 세 끼의 밥을 꼬박꼬박 먹으며 아내와 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

사실 나는 경제적으로도 별로 수입이 없고, 시골은 도시생활에 비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도 많다. 내 유일한 수입원은 재수가 좋으면 간혹 청탁을 받아 쓰는 원고료와 얼마 안 되는 국민연금이 전부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맑은 공기와 물속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채소를 자급자족하여 먹는 즐거움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다가 마을사람들이 오며가며 철 따라 나오는 푸성귀를 던져주는 훈훈한 인심은 내 마음을 더욱 부자로 만들어 가고 있다. 주머니는 텅 비었지만 마음은 점점 더 부자가 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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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채소를 자급자족하고 교통비와 외식, 그리고 경조사비(안 보고 안 가게 되니까)를 줄이게 되니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생활비는 훨씬 적게 들어간다. 말하자면 적게 쓰는 것이 내가 수입을 늘리는 유일한 길이다. 무엇보다도 아내의 건강이 전보다 훨씬 좋아져서 산골에 사는 보람을 크게 느끼고 있다.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엽서를 자주 쓰는 편이었다. 가는 여행지마다 그림엽서를 사서 틈이 날 때마다 기차에서, 버스에서, 카페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편지를 써 부치곤 했다. 따라서 여행 중에 가장 많이 들어가는 사소한 비용은 내가 쓰는 엽서 값과 우표 값이었다.

아무리 디지털 문화가 발달하여 인터넷으로 메일을 보내고, 휴대폰을 로밍하여 전화를 한다고는 하지만 육필로 써서 보내는 편지에 비할 수는 없다. 인터넷 메일과 모바일 폰은 받고나면 그냥 사라지고 말지만 육필로 쓴 편지는 오래도록 우리 주변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아이들에게 내가 부친 엽서를 다시 보게 되면 마치 여행 일기장을 보는 것처럼 여행지의 추억이 그림과 함께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내가 보낸 엽서이지만 여행에 대한 두 번의 즐거움을 선물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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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형님의 전선일기는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

나는 작년에 한국전쟁 참전 용사였던 큰형님의 일기장을 우연히 읽어보게 되었다. 그 일기장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6살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징집이 되어 1955년까지 백마부대에서 근무를 했던 형님의 전선일기장이다. 사실 이 일기장은 전선에서 고향을 그리며 고향의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부치는 편지나 다름이 없다. 전쟁 중이라 편지도 자주 쓸 수 없고, 부칠 길도 없으니 편지를 쓰는 대신 쪼가리 진 메모장에 일기를 써서 묶어둔 것이다.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그날그날 일기를 써내려간 형님의 일기 내용은 처절했다. 매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선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인데도 형님은 거의 매일 일기를 썼다. 어떤 날은 단 한 줄만 쓴 때도 있었다.

“금일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금일 하루를 잘 지났으며 오날밤까지 무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잠도 잘 잤습니다.” 단기 4288년 1월 10일 (음력 12월 8일)

이런 내용도 있다. 형님의 일기를 보면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 가장 고맙고 큰일이었다. <향수>라는 타이틀을 붙인 일기장은 손때가 묻고 묻어서 다 해어질 정도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면 <향수>라고 이름을 붙였을까? 나는 돌아가신 큰형님의 전선일기를 읽으며 몇 번이나 눈시울을 적셨는지 모른다. 내가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큰형님을 아버님처럼 생각하고 자라났다.

그런 형님께서는 육군하사로 5년 만에 제대를 한 후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주로 동상)으로 온몸이 골병이 든 데다, 정신적인 후유증으로 49세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그러나 형님은 일찍 떠나가셨지만 형님의 육필일기는 지금도 우리들 곁에 내 영혼을 울리는 편지로 오래도록 남아 있다.

감동적인 대통령의 손글씨 편지들

우리나라에서 가장 편지를 많이 쓴 대통령은 아마 고 김대중 대통령일 게다, 고 김 대통령은 옥중생활을 하면서 작은 엽서와 메모 쪽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촘촘하게 편지를 써서 그의 아내인 이희호 여사와 그의 자식들에게 보냈다. 그 일기들을 모아서 출간한 책이 《김대중 옥중서신》이다. 나는 이 책을 처음 발간했을 때에 매우 감동적으로 읽어본 적이 있다. 일주일에 한 통씩만 허용되는 봉함엽서에 빼꼭하게 쓴 옥중 편지 속에서 나는 그 분의 심경과 사상, 그리고 엄청난 독서량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 편지를 많이 쓴 대통령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라고 한다. 그는 유머감각도 뛰어난 대통령이지만 아들, 딸, 친지, 외국의 지도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수시로 편지를 써 보냈다. 그는 반대의견을 가진 정치인에게도 편지를 보내서 설득을 하기도 했다.

카네기 멜론대 커론 스키러 교수는 레이건의 자료를 조사 하던 중 5,000통에 달하는 편지를 발굴, 그 중 1,000통을 간추려서 《레이건-편지 속의 삶》이란 서한집을 내기도 했다. 8년간의 대통령직을 끝내고 알츠하이머란 치매를 앓고 있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병 상태를 국민들을 수신인으로 하여 편지를 써서 1994년 11월 5일 국민들에게 보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최근 제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수백만 명의 미국인 중 한 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내 낸시와 저는 이를 한 개인에게 일어난 가정사로 둘 것인지, 아니면 공인으로서 여러분 모두에게 알려야 할지를 논의했습니다. 우리는 투병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으로써 여러분들이 알츠하이머에 대해 더욱 주의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그의 솔직한 고백을 담은 편지는 미국 국민들의 가슴에 심금을 울려 그의 인기는 크게 상승했고, 국민들에게 ‘편지를 많이 쓴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에 길이 남게 하였다. 미국 우정청(USPS)은 레이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2011년 2월 10일 ‘레이건대통령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편지의 힘은 이처럼 큰 감동을 주는 것이다.

글·사진_ 최오균 오지여행가, <사랑할 때 떠나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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