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났더니 그 자리에 정치·권력이 발 뻗고 누웠네

자고 일어났더니 그 자리에 정치·권력이 발 뻗고 누웠네

김기중 기자
김기중 기자
입력 2020-12-24 16:58
업데이트 2020-12-25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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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의 세계사/브라이언 페이건·나디아 더러니 지음/안희정 옮김/올댓북스/344쪽/1만 8000원

개인의 가장 내밀한 공간 침대에서
처칠은 히틀러를 물리칠 전략 구상
루이 14세는 400개 이상 침대 소유
불과 150년 전부터 사적 공간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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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는 자거나 사랑을 나누는 곳만이 아닌, 다양한 의도로 활용된다. 루이 14세가 쓰던 호화로운 침대. 그에게 침대는 왕권을 드러내는 곳이자 집무실이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까지 침대에서 집무를 봤다.  올댓북스 제공
침대는 자거나 사랑을 나누는 곳만이 아닌, 다양한 의도로 활용된다. 루이 14세가 쓰던 호화로운 침대. 그에게 침대는 왕권을 드러내는 곳이자 집무실이었다. 그는 죽기 이틀 전까지 침대에서 집무를 봤다.
올댓북스 제공
영국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 ‘나의 침대´(1999)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침대로 꼽힌다. 그는 속옷, 빈 술병, 담배꽁초, 쓰고 난 콘돔, 정리 안 한 이불 등이 널린 자신의 침대를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왔다. 이 작품이 예술이냐 아니냐를 차치하고라도, 개인의 가장 내밀한 공간을 전시장으로 가져온 것에 사람들은 불쾌감을 드러냈다.

우리 인생 3분의1을 보내는 침대는 안락한 잠을 자고 사랑을 나누는 공간만은 아니다. 잉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정치와 각종 사회상이 내밀하게 얽힌 곳이자 때로는 예술작품이다. 예전 TV광고 말마따나 ‘침대는 가구가 아니었던’ 셈이다.

두 고고학자가 쓴 ‘침대 위의 세계사’는 우리가 그동안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침대의 역사를 훑으며 각종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침대는 남아프리카 더반 지역의 한 절벽 동굴 안에서 발견됐다.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대략 7만 7000년 전쯤 잠을 잤던 곳으로, 강가 근처에서 자라는 잡초와 골풀을 베어 촘촘히 쌓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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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헌이나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오후에 3~5시간 정도 잠을 잔 뒤 1~2시간 깨어 있다가 또다시 3~5시간 정도 자는 ‘이중 수면’이 가장 자연스럽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수면 형태가 바뀌었다. 학교에 가거나 일하기 위해 밤부터 긴 잠을 자는 형태로 바뀐 것이다. 윈스턴 처칠처럼 정오의 낮잠을 신봉하는 사례도 있었다. 그는 밤늦게 침대에 들어 단 4시간 동안 잠을 잤고, 침대에서 히틀러를 물리칠 전략을 짜고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항상 우울증을 앓았고, 이를 ‘검은 개’(블랙 독)라고 불렀다.

침대가 분만의 장소로 바뀐 건 16세기 프랑스에서 근대적인 산부인과 수술이 시행되면서다. 당시 한 산부인과 의사가 누운 산모 앞에 서서 의료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들어 프랑스에 세계 최초 산부인과 오텔디외가 들어섰고, 1860년대 조지프 리스터가 개발한 무균 소독법 그리고 1847년 영국 의사 제임스 심프슨이 마취 때 클로로폼을 사용하면서 출산 시 사망률이 급격하게 줄었다.

침대를 가장 사랑한 이로는 태양왕 루이 14세를 들 수 있다. 그에게 침대는 많은 호위병이 지키는 안락한 공간이자 집무실이었다. 25가지 이상 다른 디자인의 침대를 가지고 있었고, 왕실 침대 창고에 400개 이상 침대를 보관했다. 그는 죽기 이틀 전까지 침대에서 집무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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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넌(왼쪽)과 오노 요코는 1969년 호텔 침대에서 토론을 벌이는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를 했다. 이 시위를 보러 온 관람객은 100만명에 달했다. 올댓북스 제공
존 레넌(왼쪽)과 오노 요코는 1969년 호텔 침대에서 토론을 벌이는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를 했다. 이 시위를 보러 온 관람객은 100만명에 달했다.
올댓북스 제공
침대가 개인의 사적 공간으로 자리잡은 건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생겨난 150년 전에 불과하다. 침대는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휴식과 쇄신의 장소가 됐다. 물론 1969년 존 레넌과 오노 요코가 호텔에서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를 펼치며 정치적인 공간을 만들어 낸 사례도 있다. 최근엔 도시에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번쩍 들어 올려 벽에 세울 수 있는 ‘머피 침대’까지 생겨났다. 이 침대에 끼어 죽은 이가 상당수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침대는 우리 생활에서 필수 가구가 됐지만, 우리가 그 위에서 보낸 시간은 그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책은 고대부터 미래까지, 또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 등 종횡으로 이야기를 펼치며 그 공백을 메운다. 책은 간결한 문체와 빠른 이야기 전개로 지루할 틈이 없다. 느슨하게 침대에 누워 읽기에 좋을 듯하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2020-12-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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