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앞 ‘비겁한’ 신중함에 대하여

부조리 앞 ‘비겁한’ 신중함에 대하여

입력 2014-07-10 00:00
업데이트 2014-07-10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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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6년 만의 소설집 ‘신중한 사람’

신중함이 지나쳐 저지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이들은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커녕 소소한 부당함마저 바로잡지 못한다. 스스로의 삶을 미궁에 빠뜨리는 건 물론이고 부조리한 현실을 더 심화시키는 개인,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267쪽) 세상. 이승우(55·조선대 교수) 작가가 아홉 번째 소설집 ‘신중한 사람’(문학과지성사)에서 드러내는 우리 삶의 역설적이고 비루한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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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작가는 “이번 소설집 제목을 보고 지인이 (내 성격을 빗대) 그냥 ‘이승우’라고 짓지 뭐하러 ‘신중한 사람’이라고 지었냐고 그러더라”며 “앞으로도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자기 설득, 자기 합리화, 자기 기만의 감정들을 쓸 것 같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승우 작가는 “이번 소설집 제목을 보고 지인이 (내 성격을 빗대) 그냥 ‘이승우’라고 짓지 뭐하러 ‘신중한 사람’이라고 지었냐고 그러더라”며 “앞으로도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자기 설득, 자기 합리화, 자기 기만의 감정들을 쓸 것 같다”고 말했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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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사랑하는 작가이자 노벨문학상에 근접한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그가 6년 만에 새 소설집을 내놨다. 1981년 중편 ‘에리직톤의 초상’ 이후 33년간 쉼없이 소설에 몰두해 온 작가답게 오래 정련되고 응축된 공력이 돋보이는 8편의 단편에서는 제목처럼 ‘신중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은퇴 뒤 전원 생활을 꿈꿔 온 Y는 7년을 공들여 교외에 집을 지어놓고도 들어가지 못한다. 아내와 딸의 성화에 3년간의 해외 파견을 마쳐야 했던 것. 기러기 아빠가 되어 돌아온 Y 앞에 펼쳐진 ‘꿈의 집’은 우악스러운 사내가 꿰차고 앉아 망가뜨린 지 오래다. 하지만 Y는 집주인이면서도 세입자인 사내에게 월세를 내가며 퀴퀴한 다락방에 기거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을 받아들인다(신중한 사람).

취업 강의차 지방 도시를 찾은 ‘나’는 새벽 5시마다 절로 켜지는 여관 텔레비전에 불쾌하게 잠을 깬다. 여관 주인에게 리모컨을 요구하지만 일방적으로 묵살된다. ‘나’는 한 번 당차게 따져보지도 못한 채 ‘무언가 억울했지만 무엇이 억울한지는 선명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뿐이다(리모컨이 필요해).

작가는 “연작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에 실린 8편의 주인공 모두를 지칭하는 캐릭터라 ‘신중한 사람’을 고민 없이 제목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내세운 ‘신중한 사람’은 긍정과 부정, 양면의 얼굴을 이루고 있지만 부정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동사가 지배하는 사회’잖아요. 사람들도 행동이 먼저 앞서고 소설들도 동사, 사건 위주로 쓰여지죠. 그렇게 감각과 행동이 앞선 요즘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신중한 사람들을 들여보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단 권력과 현실, 기성 세계와 대결하는 개인의 무력함,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인물에 대한 반성적인 글에 더 가까워요.”

오래전부터 세계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개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작가는 그래서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인물들을 여럿 그려냈다. ‘이미, 여기’의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퇴직금을 가족에게 ‘n분의1’로 나눠 준 뒤 ‘이미’에서 산 45년의 세월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떠나온다. ‘어디에도 없는’의 ‘유’는 ‘여기’서 내몰리자 E국의 대도시로 떠나려 한다. 비행기 표를 끊어도 비자가 나오지 않자 비자센터로 달려간 그는 소리친다. “난 벌써부터 여기 없다고요. 그런데 왜 이래. 있지도 않은 사람한테 왜 이래.” 모두 현실을 개조하거나 현실과 싸울 의지나 용기가 없어 다른 세계를 꿈꾸는 ‘신중한 사람’의 연속이다.

이번 단편집에서는 ‘헛된 기다림의 불안과 실패를 상연하는 편집증적 재현의 글쓰기’(정홍수 문학평론가)도 두드러진다. ‘그는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하지만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어떤 행동도 않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113쪽)라든지 ‘그는 불안을 없애기 위해서 손톱을 물어뜯고 손톱을 물어뜯어 물어뜯을 손톱을 제거함으로써 다시 불안을 만들어낸다.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는 사람에게는 물어뜯을 손톱이 없으면 없어서 불안하고 있으면 있어서 불안하다’(121쪽)는 대목이 그러하다.

이렇게 부연·첨언하면서 주저하며 나아가는 문장에서는 개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탐색해 들어가는 작가의 변화가 감지된다.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기 앞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자기 설득, 자기 기만의 과정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한 문장을 써놓고 나면 충분치 않아 앞의 문장을 조금씩 비트는 방식은 제자리에 맴도는 것 같지만 개인의 내면을 더 깊게 파고들고 확대합니다. 요즘은 소설도, 매체도, 우리가 사는 모양도 속도감 있게만 나아가는데 그에 대한 반작용이랄까요. 제 소설도 (독자들이) 재미있게 읽길 바라지만 빨리 읽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웃음).”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4-07-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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