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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흔들리는 미중관계…中 ‘하나의 중국’에 매달리는 이유

판 흔들리는 미중관계…中 ‘하나의 중국’에 매달리는 이유

입력 2016-12-13 13:57
업데이트 2016-12-13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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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2일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해 “중국의 주권, 영토 완정(完整·완전하게 갖춤)에 관한 문제이자 중국의 핵심 이익에 관한 문제”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미국과 중국 간 관계 발전의 정치적 기초이자 전제조건이라고 강조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 대내외 관계의 핵심 중 핵심이라는 뜻이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 대륙과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을 모두 중국의 영토로 보고 이중 오직 중국만을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아직 대만에 대한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양안의 중국인은 모두 ‘하나의 중국’에 속해 있고 국가의 영토와 주권을 분할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중국은 심지어 대만에 대해서도 일중각표(一中各表·‘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 합의로, 홍콩, 마카오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적용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관철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중국이 이토록 민감해 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대중 압박, 특히 북핵 해결을 위한 지렛대로 삼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중국은 허를 찔린 표정이 역력하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도저히 깰 수 없는 굳건한 원칙이라고 여겼던 중국은 트럼프·차이잉원(蔡英文) 전화통화와 트럼프의 폭스뉴스 인터뷰 등으로 간단히 37년간의 미중관계 근간이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특히 트럼프의 언행이 단순한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고도로 계산된 전략적 행보일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에서 중국의 우려가 크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중국 대륙의 내전 혼란기에 장제스(蔣介石), 마오쩌둥(毛澤東)과 여러 군벌이 이전 청나라가 확보한 중국 역사상 최대의 강역을 이어받아 ‘천하통일’ 대업을 완수하겠다는 원대한 꿈에서 비롯됐다.

이는 1941년 중국의 대일선전포고, 1943년 카이로선언, 1945년 포츠담선언 및 일본 항복문서 등에서 당시 일본에 침탈됐던 대만 등을 중국의 수복 대상으로 명문화하면서 구체화했다.

1949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고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축출되자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정부는 중화민국 정부를 대체해 중국 대륙 유일의 합법 정부임을 선포했다.

중국은 국민당 정부에서 비롯된 대만 수복 원칙을 그대로 계승해 ‘하나의 중국’을 국시(國是)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하나의 중국’ 원칙은 미중 수교 과정에서 한층 더 정교화되기 시작했다.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이 1971년 7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한 일은 25년간의 미중간 단절을 종식하고 냉전시기 지정학적 판도를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중화민국(대만)은 현실적으로 대만 섬만 통치하고 있었을 뿐이지만 1971년 10월까지 미국의 지원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지위를 누려오다 결국 그 자리를 중국에 내줘야 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상하이 코뮤니케’가 마련됐다. 대만해협 양안의 모든 중국인은 ‘하나의 중국’에 속해 있으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라는 점을 미국이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어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인 1978년 미국은 중국을 공식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미국은 대만과 단교하고 1979년 1월 타이베이 주재 미국대사관을 폐쇄 조치했다.

중국은 미중수교 이후 다른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을 때도 ‘하나의 중국’ 원칙을 준용하기 시작했다. 중국과 수교하길 원하는 어느 국가도 대만과 공식 외교관계를 단절해야 하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표면적으로 수용했지만 대만관계법을 제정, 대만에 무기를 판매하며 대만과 비공식 관계를 이어왔다.

특히 대만의 민주화가 이뤄진 1979년부터 미국은 중국, 대만에 대해 동시 억제정책(dual deterrence) 정책을 펴왔다. 중국이나 대만 모두 현상을 일방적으로 변경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중국, 대만 모두 지속적으로 변화를 모색했으나 미국은 40년전 채택된 이 정책을 어느 쪽도 흔들지 않도록 요구하며 꾸준히 밀어붙였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에 대한 중국 당국의 유혈진압은 미중 양국 관계를 경색시키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고위층 교류 중단, 인권탄압 비판,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를 강화했다.

미국이 1995년 당시 리덩후이(李登輝) 대만 총통에게 모교인 코넬대 초청 방문을 승인하자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 위배라고 주장하며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대만의 첫 직선 총통선거가 다가오고 리 총통이 출마를 준비하자 중국은 대만해협을 포함한 수역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때가 1995년 후반부터 1996년 초기까지 일어난 일이었다.

이런 냉각관계는 1997년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미국을 국빈 방문하고 뒤이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1998년 답방하면서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대만독립 성향의 민진당 천수이볜(陳水扁)이 2000년 총통선거에서 승리하며 양안 관계가 더욱 악화하자 ‘하나의 중국’ 원칙은 미국, 중국, 대만 3자 간의 핵심 현안으로 다시 떠올랐다.

양안의 긴장은 친중국 계열의 마잉주(馬英九) 총통 당선과 연임 성공으로 한층 완화됐으나 민진당 계열의 차이잉원 총통이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긴장 국면이 고조되고 있다.

차이 총통은 지금도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에 합의된 92공식(九二共識·1992년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각자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합의)을 공개적, 명시적으로 인정하길 거부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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