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의 고백, “나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성폭행 피해자의 고백, “나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아요”

최훈진 기자
입력 2016-06-08 11:10
수정 2016-06-08 11:1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CNN 앵커, 피해여성 편지 전문 낭독

이미지 확대
스탠퍼드대 성폭행 사건 가해자 브록 터너
스탠퍼드대 성폭행 사건 가해자 브록 터너 지난해 1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퍼드대 캠퍼스 안에서 정신을 잃은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지른 브록 터너(20). 샌타클라라 지방법원이 지난 2일(현지시간) 터너에게 징역 6월 보호관찰 3년을 선고한 것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후폭풍이 계속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가 잃은 것은 수영선수 자격, 학위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이지만 나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오늘까지도 인간으로서 나의 가치와 에너지, 시간, 자신감, 목소리를 빼앗아가고 있다.”

성폭행 피해 여성이 법정에서 낭독한 편지다. 범죄를 저지른 남성은 법원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지만, 피해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평생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편지가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분노가 퍼지고 있다.

이 여성은 지난해 1월 캘리포니아주 팰로앨토에 있는 스탠퍼드대 캠퍼스 안에서 이 대학 학생이자 수영선수였던 브록 터너(20·사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피해자는 주변에 사는 회사원이었고, 터너가 소속된 사교클럽의 파티에 갔다가 성폭행을 당했다. 터너는 지나가던 학생들에게 발견돼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검찰은 징역 6년을 구형했으나 지난 2일(현지시간) 샌타클라라 지방법원은 징역 6월과 보호관찰 3년을 선고했다. 재판을 맡은 애런 퍼스키 판사는 터너가 전과기록이 없는 데다 죄를 뉘우치고 있어 이렇게 판결했다고 말했다. 터너는 법정에서 피해자가 술에 취한 상태인 줄 몰랐고, 자발적으로 성관계에 응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터너는 학교에서 징계를 받기 전 자퇴했다. 그의 아버지는 “20년 인생에서 20분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대가치고는 혹독하다”는 편지를 재판부에 보냈다.

이 내용이 소셜미디어에 공개되자 비난이 들끓었다. 터너가 백인이고 유명 대학에 재학 중인 유망한 운동선수였기 때문에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는 것이다. 판결 논란에 기름을 부은 것은 피해자의 편지였다. 이 여성은 성폭행을 당했을 때부터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적은 편지를 법정에서 읽었다. 온라인 뉴스사이트 버즈피드가 편지를 입수해 보도했고 6일에는 CNN 앵커가 방송에서 전문을 낭독했다.



아래는 피해 여성이 법원에서 낭독한 편지 내용.

“보안관이 제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설명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분명히 다른 사람한테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죠. 제가 제 몸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두려웠어요. 제 몸 안에 뭐가 있었던 건지, 누가 만지고 더럽혔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재킷처럼 내 몸을 벗어던지고 병원에서 나오고 싶었어요.”

“여동생이 병원으로 저를 데리러 왔을 때 그 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돼있었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어요. 순간 동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서 이렇게 말했죠. ‘나 여기 있잖아. 괜찮아. 다 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

“그날밤 일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그 기억은 끔찍할 정도로 무거워서 입도 뗄 수 없었죠. 밥도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했어요. 누구하고도 마음을 나누지 못했죠 일이 끝나면 외딴 곳으로 차를 몰고 가 소리를 지르곤 했어요. 그렇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어졌어요.”

“제가 당한 일이 기사로 나온 날 부모님을 앉히고 성폭행을 당했다고 얘기했어요. 어떻게든 기사를 못 보게 하려고 했죠. 보면 속상하실 테니까요. 그렇게 중간쯤 얘기했을까. 어머니는 저를 끌어 안아야만 했어요.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저는 괜찮지 않았어요.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어요.”

“터너는 사건이 일어난 그날밤 제가 자기 등을 문질렀고, 제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로 생각했다고 말했죠. 등을 비볐다고요. 그렇지만 절대로 동의를 구한 적이 없었어요. 저에게 말조차 건낸 적이 없었죠.”

“기사를 보고 엉덩이와 성기가 발가벗겨진 채 발견됐다는 걸 알았어요. 쓰레기통 뒤쪽 땅바닥에 제 맨살과 머리가 끌렸던 것도 알게 됐죠. 하지만 그날 일이 기억나지 않아서 제 뜻과 상관없이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없었어요.”

“가장 안 좋은 상황은 터너가 제가 그날 일을 기억 못한다는 걸 안다는 사실이었죠. 그는 각본 한 편을 썼어요. 그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었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죠. 속수무책으로 당했어요. 터너의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그들이 믿어야 할 건 터너의 말뿐이고, 제가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계속해서 말했어요.”

“저는 치료를 받아야 할 시간에 그날밤 일을 다시 자세히 떠올려야만 했어요. 터너 측 변호사의 질문에 맞받아 쳐야 했으니까요. 변호사는 저와 파티에 같이 갔던 제 동생의 말이 앞뒤가 안 맞게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사건과 관계없는 질문들을 수도 없이 받았어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었죠. ‘몸무게는 얼마나 나가나요? 그날 뭘 먹었죠? 저녁은 누가 했죠? 언제 소변을 봤나요? 어디서 소변을 봤죠? 누구와 함께 소변을 보러 파티장 밖에 나갔나요? 평소에 얼마나 자주 술마시고 필름이 끊기죠? 남자친구와는 진지한 사이인가요? 남자친구와 성관계를 할 때 적극적인 편인가요? 언제부터 사귀었나요?’”

“(성폭행 사건이 일어난) 그날밤 이후로 전등을 켜지 않으면 잠을 못 자요. 마치 다섯살짜리 꼬마애처럼 말이죠. 제가 깰 수 없는 곳에서 누군가에게 추행당하는 악몽에 시달려서 그랬어요. 한 석달은 해가 뜨기만 기다렸다가 아침 6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어요.”

“터너가 유명대학의 유망한 운동선수라는 게 관대한 판결의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성폭행은 사회적인 계급과 상관없이 처벌받는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줘야죠. 만약 지역 전문대를 다니는, 운동선수가 아닌 사람이 저를 성폭행했다면 어떤 판결이 나왔을까요. 만약 특권층 자녀가 아닌 사람이 처음으로 성폭행을 저질렀다면 어떤 판결이 나왔을까요. 터너가 빨리 헤엄칠 수 있다고 해서 제가 받은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아요.”

“누구보다도 저를 구해 준 두 남성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도 만나고 있는 분들이죠. 저는 제가 직접 그린 자전거 그림을 침대 머리 맡에 테이프로 붙여놨어요. 이 이야기에도 영웅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싶어서요.”

“(성폭행 피해 여성들에게) 당신이 혼자라고 느껴지는 밤이면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의심하고 거부할 때 나는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매일 당신을 위해서 싸우고 있어요. 그래서 이 싸움을 멈출 수 없습니다. 당신은 소중하고,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누구도 당신에게서 당신 삶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곳에 있는 여성들에게, 나는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사법고시'의 부활...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달 한 공식석상에서 로스쿨 제도와 관련해 ”법조인 양성 루트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과거제가 아니고 음서제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실질적으로 사법고시 부활에 공감한다는 의견을 낸 것인데요. 2017년도에 폐지된 사법고시의 부활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1. 부활하는 것이 맞다.
2. 부활돼서는 안된다.
3. 로스쿨 제도에 대한 개편정도가 적당하다.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