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SBS ‘모래시계’의 태수는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나 지금 떨고 있니?”라고 읊조리듯 말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카리스마 넘치는 ‘깡패’ 태수. 끝까지 ‘각’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도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만큼은 온갖 회한이 공존하는 아프고 두려운 순간을 맞았다.

2012년 JTBC ‘해피엔딩’의 두수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어느날 갑자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그는 그나마 인생을 정리하기까지 6개월이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앞만 보고 우직하고도 치열하게 달려왔던 ‘기운 짱짱한’ 사회부 기자 두수도 가족을 두고 떠나야 하는 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과 평소 다정하게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없던 그는 겨우 손에 쥔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인생과 주변을 정리해야 한다.

’모래시계’와 ‘해피엔딩’ 사이 1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태수에 이어 두수를 연기 중인 배우 최민수(50)도 그만큼의 시간을 어깨에 얹고 변해 있다.

태수의 마지막이 가슴에 비수가 꽂히듯 강렬했고 그 파장이 요란했다면, 두수의 마지막은 상대적으로 조용하지만 가슴을 후벼 파듯 절절하게 만든다. 두 캐릭터의 차이와 함께 세월의 무게만큼 최민수의 연기도 다르다. 하지만 그가 표현하는 진정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농도가 짙다. 그래서 여운도 깊다.

최민수를 6일 인터뷰했다.

그는 “솔직히 지금껏 했던 연기 중 가장 몸이 안 힘든 캐릭터다. 액션이 있길 하나 칼을 들고 싸울 필요가 있길 하나. 그런데 연기하기가 가장 힘들다. 피가 바짝바짝 마른다. 못 견디겠다”고 토로했다.

’해피엔딩’은 정신없이 살던 방송사 사회부기자 김두수가 어느 날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을 받은 후 자신의 ‘콩가루 집안’ 정비에 나서며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다. 종영까지 3회 남은 드라마는 이제 두수의 진짜 마지막을 앞두고 있다. ‘다발성골수종’이라는 희소병을 앓는 두수는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몸 전체를 감싼 상태다. 최민수는 이를 표현하기 위해 ‘곡기’를 거의 끊은 채 5일 만에 5㎏을 감량해 실제로도 기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다.

”암세포가 몸 전체에 전이된 지금 두수는 미각도 없고 신체의 고통은 말로 표현못한다”는 그는 “그런데 내가 연기를 잘 못하니까 그런 상태를 표현해낼 길이 없는 거다. 두수의 상황을 10분의 1, 100분의 1이라도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굶으며 잠이라도 안 자야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그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내가 연기를 위해 살을 얼마나 뺐느냐가 주목받는 그런 레벨은 아니지 않냐”는 말로 외양의 변화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거부’한 그는 “내가 연기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연기를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두수 자체가 돼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강한 카리스마 못지않게 누구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최민수는 ‘해피엔딩’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 대본을 읽고, 촬영을 하고, 방송을 보면서 눈물과 울음을 주체할 수 없는 순간이 이어지고 있다.

”집에서 혼자 대본을 보면서 웁니다. 분명히 혼자 있는데도 그런 내 모습을 누가 볼까 봐 주위를 살피며 울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극중 아버지인 최불암 선배님과 병원 신을 찍은 후 빈 병실에 들어가 한참 동안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그리고 방송을 보면서도 웁니다. 나도 방송을 통해 두수를 구경하는 거거든요.”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인터뷰 도중 갑자기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 대목은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천하의 최민수’가 두수에 얼마만큼 빠져 있는지를 이보다 잘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하다.

그는 두수와 28년을 살며 사남매를 키우고 소리없이 뒷바라지를 해준 아내 선화(심혜진 분) 이야기를 하다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두수에게 애란(이승연)은 풋사랑이었던 것이고 선화는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입니다. 그걸 죽음을 앞두고야 두수는 깨달은 거죠. 지극히 평범한 삶이었지만 그 삶이 선화 덕분이었고 그런 선화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두수는 이제야 깨달았죠. 그런데 그런 선화와 자식들을 두고 떠나 야합니다. 사실 오늘 죽는 신을 찍으러 가는데….”

그러고는 잠깐이지만 ‘폭풍 오열’을 했다.

그는 “배우는 자기가 흥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흥분시켜야 하는데 내가 이러고 있다”며 민망해했다.

결혼 18년, 두 아들의 아빠인 최민수에게 두수의 삶은 그저 드라마일뿐이라고 하기엔 스스로도 감정이입을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기자 두수도 배우 최민수도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똑같습니다. 팩트(fact)를 생명으로 알고 만사 명확하게 살아온 두수나 매번 연기하면서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았던 최민수나 눈에 안 보이는 리얼리티까지 찾으려 한 건 같은 거죠. 그러니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고 뻥 맞은 느낌이 들었을 두수의 심정은 굳이 계산해서 연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지금껏 주로 강렬한 캐릭터 열전을 펼친 최민수는 ‘해피엔딩’을 통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버지, 가장, 중년 남성이 됐다.

”’해피엔딩’이라는 작품은 두수 그 자체가 아니었나 싶어요. 시끄럽고 요란하지는 않았지만 작품 안에서 찾아가야 할 가치가 많았죠. 최대한 일상성을 강조하려고 했는데 그 가운데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부분들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해피엔딩’이 오는 16일 종영하고 나면 최민수는 언제나 그랬듯 홀로 바람처럼 유랑에 나설 계획이다.

”홀로 유랑을 하며 비우고 와야죠. 바이크 타고 전국일주하고 싶은데 유성이 엄마(아내)에게 절반은 허락도 받았어요.(웃음) 비우고 와야 이 마음이 풀리지 안 그러면 견딜 수 없죠.”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이 기사는 2012년 7월 7일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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