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일 기념 공연 ‘꽃으로 물들다’…“아름다운 기억, 남편과의 뜨거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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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50주년 맞은 가수 정훈희
정훈희, 편안한 미소
정훈희, 인터뷰 앞서 포즈
데뷔 50주년 공연 앞둔 정훈희
정훈희, 인터뷰 앞서 포즈
정훈희, 미소 활짝
데뷔 50주년 맞은 가수 정훈희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남편(가수 김태화)이랑 뜨겁게 사랑한 거죠. 하하하.”

가수 정훈희(64)의 유머 섞인 말투에선 특유의 에너지가 넘쳤다.



“젊은 날 지금의 지드래곤 같던 남편이 껌딱지처럼 붙어 쫓아다녔어요. 앞뒤 안 가리고 먼저 살림을 차리고 첫 아이가 3살 때 결혼식을 올렸죠. 작은 교회에서 꽃길 하나 없이 했지만 꽃길이 필요한가요?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죠.”

‘한국의 다이애나 로스’로 불린 정훈희가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았다. 부산 기장군 해변에서 남편과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며 사는 그는 17~18일 서울 성동구 소월아트홀에서 ‘기념 콘서트-꽃으로 물들다’를 준비하느라 일정이 빠듯해 보였다.

최근 여의도에서 인터뷰한 그는 큰 눈의 서구적인 미인으로 환갑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음을 유지했다.

그는 “지금 막 ‘아침마당’ 생방송에 출연했는데 ‘젊어 보인다’길래 ‘카메라를 줌인해보라’고 했다. 눈가가 얼마나 자글자글한 지”라고 시원스레 웃었다.

“세월이 화살같이 지나간다고 하잖아요. 분명 50년을 살아냈는데 농축된 느낌이죠. 사람들은 속상하고 좌절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대요. 저도 그런 게 잘리고 나니 너무 짧게 느껴져요.”

악극단 출신 가수인 아버지 정근수 씨와 음악 하는 오빠들 사이에서 자란 그는 1967년 신데렐라처럼 등장했다.

17살에 당시 최고의 작곡가 이봉조의 눈에 띄어 신성일·정윤희 주연 영화 ‘안개’의 동명 주제곡을 발표했다. 지금은 10대 아이돌 가수가 즐비하지만 당시로선 특별했다.

고1 때 방학을 맞아 부산에서 상경한 그는 작은아버지가 악단장으로 있던 남대문 옆 그랜드 나이트클럽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몇 곡을 부르게 됐다. 마침 클럽 옆 레스토랑에 있던 이봉조는 재즈풍의 발라드를 수려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이끌려 찾아왔다.

그는 “이봉조 선생님이 이미 색소폰 연주로만 발표한 ‘안개’의 LP를 건네며 연습해오라고 했다”며 “1주일 뒤 ‘안개’의 가사를 주셨고 밴드와 두세 번 불러 릴테이프에 녹음해 데뷔곡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이봉조는 두세 개의 릴테이프를 만들어 DJ 최동욱이 진행하는 동아방송 ‘세시의 다이얼’과 MBC 라디오에 전달했다.

최동욱은 ‘세시의 다이얼’에서 “신인가수가 불렀다는데 개봉할 영화 주제가라고 하더라”며 “한국 노래는 안 트는데 이 노래는 외국 노래 같다. 여러분에게 추천하는 곡”이라고 소개하며 노래를 내보냈다.

“그 이후 ‘얘가 누구냐’고 동아방송 전화통이 불이 났어요. 릴테이프는 복사가 안 되니 PD들이 자기 방송에 틀려고 릴테이프를 숨겨서 집에 갖고 가곤 했죠. 당시엔 버스 종점마다 레코드 가게가 있었는데 스피커 두 쪽을 내놓고 ‘안개’를 종일 틀었어요.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노래가 먼저 뜬 거죠.”

TV에 나가 노래하기 시작하자 스무 살이 되기 전 큰돈을 벌었다. 집이 300만 원이고 사람들 월급이 2만8천 원 할 때, 그의 개런티는 한 번에 1만 원이었다.

그는 “하루 다섯 군데서도 노래했다”며 “너무 일찍 내 옆에 돈이 있었지만 그땐 돈맛을 모르니 스쳐 지나가더라. 5남매 중 유일한 딸이라 ‘딸바보’ 아버지가 여자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용돈을 많이 줘 다 누린 셈”이라고 웃었다.

처음 국제선 비행기를 탄 것도 1968년이다. 베트남전 위문 공연 차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세 차례 다녀왔다고 한다. “그땐 유서를 써놓고 나갔다”며 “백설희와 현미 선배, 이봉조 밴드 등과 함께 공연했다”고 회고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지금의 한류 가수 못지 않게 국제무대를 누볐다. ‘무인도’, ‘너’, ‘좋아서 만났지요’ 등의 곡으로 1970년과 1972년 ‘도쿄 국제가요제’를 시작으로 ‘그리스 아테네 국제가요제’, ‘칠레 국제가요제’에서 수상했다. 스웨덴 그룹 아바가 데뷔 초기 참여해 수상하지 못한 제1회 도쿄 국제가요제에서 정훈희가 두 개의 상을 받은 일화도 있다.

호사다마일까. 1975년 대마초 파동이 불어닥쳤고 정훈희 역시 연루됐지만 혐의가 없자 훈방조치 됐다. 1976년에는 스토커가 극장 공연을 하러 간 그의 얼굴을 돌로 가격해 흉터가 남았다.

그는 “대마초 파동 이후 1981년까지 6년간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며 그 사이 미국에서 그룹 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가수 김태화와 1979년 가정을 꾸렸다고 했다. 디바와 로커의 만남이었다.

“요즘 주말에 남편과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는데 70대까지 같이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우린 소리꾼이라 서로의 소리에 반해 같이 산다’고 말하죠. 우린 각방을 쓰며 서로에게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는 민주주의적인 부부죠. 하하.”

그는 1981년 발표한 ‘꽃밭에서’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봉조 작곡가가 선물한 두 번째 ‘인생곡’이었다. 그러나 그때 이후 앨범을 내지 않고 다시 긴 공백기를 가졌다.

그는 “인간 정훈희로 살고 싶었다”며 “오래 활동하지 않자 후배들이 ‘언니가 노래해야 우리도 그걸 보고 쫓아간다’고 독려해 2000년대 들어 활동을 재개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작곡가 고(故) 이영훈 등과 작업한 40주년 앨범을 냈고, 2011년 윤상의 20주년 앨범에서 ‘소월에게 묻기를’을 부르는 등 부지런히 후배 작곡가들과 호흡을 맞췄다. 또 대한가수협회 수석 부회장을 맡아 선후배들의 가교 역할도 했다.

그는 “난 참 음악 하길 잘했다. 무슨 이런 복을 타고났을까 생각한다”며 “음악의 피를 물려주시고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으니 날아다니며 살라’고 한 아버지, 자식밖에 모르고 사시다가 올해 5월 94세에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감사하다. 그런 생각만 하면 나이가 들어선 지 마음이 찡하고 눈물이 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평생을 함께한 음악의 힘을 비로소 느낀다고 했다.

“촛불집회에서 양희은 씨가 ‘아침이슬’을 부를 때 시민들이 합창해 감동적이었어요. 누가 노래를 따라 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대중이 무대 위 가수에게 준 권력이더라고요. 저도 50년간 무대에서 누릴 권력을 준 팬들에게 감사하고 더 잘해야겠어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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