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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대의 방방곡곡 삶] 염무웅 선생의 문장/문인화가·시인

[김주대의 방방곡곡 삶] 염무웅 선생의 문장/문인화가·시인

입력 2021-08-03 17:42
업데이트 2021-08-04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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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대 문인화가·시인
김주대 문인화가·시인
흔히들 점잖음과 유머를 이질적인 것으로 보지만, 점잖음과 유머를 동시에 장착하고 때때로 발현하시는 분이 있다. 점잖게 웃기는 분이다. 그분은 얼굴 근육을 통해 만들어 내는 다종의 미소 중에 특별히 은은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능력을 가진 분이다. 평론가 염무웅 선생. 최근에 발간한 선생의 저서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김용태는 나에게 창자 속에 든 것까지 다 꺼내 보여 준다는 태도였다. 그렇게 개복(開腹)까지 했음에도 김용태 역시 나에게는 속내를 다 알아내지 못한 인물이다.” ‘개복’ 즉 배를 갈라 다 보여 줬다는 의미의 이 대목에서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배 째서 다 보여 줘도 그 속을 모르겠다는 선생의 능청스러움이나 무지(ㅎ)에 또 웃지 않을 수 없고. “…젊은 기자들은 많은 경우 나의 오해이기를 바라지만, 넓게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할 대학 시절에 고시공부하듯 암기에만 몰두해서 ‘유식한 맹목’이 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하기는 판검사들은 더한 것 같지만….”

‘유식한 맹목’이라는 말도 재밌지만, 말을 끝맺는 듯하다가 느닷없이 판검사들을 끌어와서 패대기를 치고 계신다. 통쾌한 미소가 저절로 인다. (젊은 시절 지인의 소개로 만난 여성과의 첫 대면에서) “척 보니 나처럼 소심한 학삐리가 감당하기에는 과분했고… 나는 기탄없이 웃고 떠들어 대는 실례를 저지름으로써 배우자 아닌 친구로는 지낼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고, 그날 이후 그 여성은 내게 다시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맘에 들지 않았으면 “기탄없이 웃고 떠들어 대”셨을 리가 없다. 결혼할 형편은 못 됐으나 앙큼하시게도 친구로는 지내고 싶은 욕심은 있으셨던 모양이다. 아, 그러나 우리의 과분하게 매력적인 여성은 그 후로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 여성은 자존심이 상했을까, 염무웅 선생의 ‘명랑한’ 계산을 간파했을까? 알고 보면 염무웅 선생은 참 유머가 풍부한 분이다. 그 유머가 가볍지 않아서 그렇지 들여다보거나, 귀 기울이면 미소가 저절로 인다. 지난날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해 방북하신 2박3일간의 이야기에서도 선생의 유머가 슬슬 드러난다.

“나는 동승한 안내원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환영하는) 인민들이 몇이나 거리로 나왔을까요?’ 하지만 그는 쓸데없는 질문 말라는 듯 대꾸했다. ‘그 어케 셀 수 있갔습네까?’” 아이 같은 순정한 호의와 호기심으로 ‘인민’이라는 북한 일상용어까지 동원해 물었으나 돌아온 건 북한 안내원의 무심한 대답(불친절로 보지 않으심). 한 방 먹은 선생의 무안하고 멍~해진 표정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내가 옆에 있었으면 선생의 무안을 달래 드리려 북한 안내원에게 이북 사투리를 흉내내어 한마디했을 것이다.

“이보라우, 안내원 동무, 그 머이 대답이 그렀습네까. 우리 샘이 진정 달뜨고 좋아서 물어본 걸 고따구 면박적 대답으로 뭉갭네까?” 그러면 또 북한 안내원은 머리를 긁으며 “죄송합네다. 셀 수 없이 많이 나왔구만요”라고 하겠지. 생각만 해도 좋다. 선생의 말씀 한 자락 그대로 옮긴다.

“평화와 민주주의, 민족적 자주와 사회적 평등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진정으로 바람직한 상황을 통일이라 할 때, 그것은 어떤 극적인 한순간의 감격이라기보다 일상적 실천과 자기희생을 동반한 점진적 성숙의 현실적 축적일 것이다.” 어릴 적 본 전쟁영화에는 껌을 씹으며 전투를 수행하는 주인공들이 더러 나온다.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우스갯소리를 하고 껌을 질겅질겅 씹어 대는 그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긴장을 풀려는 노력이겠지만, 여유와 유머로도 보였다.

그 어떤 이질적인 것이 한몸처럼 전개되는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염무웅 선생의 글과 말씀들을 통해 상처와 고통을 끌고 가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한반도 남북 주민의 오늘을 보았다.
2021-08-04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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