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마당] 프로는 울지 않는다/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문화마당] 프로는 울지 않는다/이진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피아니스트

입력 2019-06-05 17:40
업데이트 2019-06-06 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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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상 피아니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진상 피아니스트·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저녁 6시 30분. 언제 입을까 하며 쟁여 두었던 이브닝 슈트와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반년 전 사두었던 티켓을 잊지 않았나 확인하며 출발할 채비를 차린다. 오늘 공연될 오페라의 내용도 공부를 해 두었으므로 만반의 준비가 다 된 느낌이다.

저녁 7시 30분. 도시의 명물 오페라하우스가 화려한 조명을 뽐내며 환영하는 가운데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 여유 있게 좌석을 미리 확인한다. 로비에서 샴페인 한 잔을 걸치며 영혼을 마사지한다.

저녁 7시 58분.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pardon, pardon)를 속삭이며 좁은 객석 사이를 지나 예매했던 자리에 안착한다. 프로그램을 뒤적이지만 마음은 이미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저녁 8시 정각. 객석의 불이 꺼지면 읽고 있던 프로그램을 덮고 숨죽인 채로 무대의 커튼을 바라본다. 10분여의 서곡을 시작으로 오페라의 막이 오른다. 드디어 막이 열리면서 가수가 양팔을 벌리고 포효하면 그의 빛나는 고음은 천장을 수놓고, 이윽고 떨어지는 음색의 샹들리에는 귓가를 스쳐 목덜미와 어깨를 타고 살갗에 닭살을 일으킨다.

저녁 7시 45분.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은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건물 뒤편 작은 문에 도착한다. 자물쇠를 걸고 동료에게 인사를 나누며 문을 들어가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매일 아침 8시 55분 출근 장면처럼.

저녁 7시 50분. 화장을 하고 코스튬을 입는다. 오페라 ‘팔리아치’의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의 장면이 연상된다. 자주 해본 솜씨인지 분장이 오래 걸리지는 않고 금세 오늘의 가수로 변신한다. 복장을 갈아입는 동안 발성도 하고 있으니 슬슬 목도 풀리고, 만반의 준비가 다 된 느낌이다.

저녁 8시 10분. 대기하라는 분장실 방송을 듣고 백스테이지에서 무대로 달려나갈 준비를 한다. 동료들의 “힘내!”(toitoitoi!) 응원과 함께 무대로 들어간다. 조명은 찬란하게 빛나고 포효하기 시작한다.

이 두 타임테이블의 온도 차이는 예술학교를 다니고 무대 연주가를 꿈꾸던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사실이었다. 젖 먹던 힘까지, 죽을 힘을 다해, 오늘이 내 마지막 연주라 생각하고, 마지막 음을 끝낸 뒤 그대로 쓰러질 각오로…,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를 하는 것이 연주자가 가져야 할 당연한 자세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 무대 생활에서 프로 연주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길게 내다보는 자기 관리다. 입시시험이나 콩쿠르같이 단 한 번의 연주로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닌, 매일매일의 연주가 합쳐져 연주자의 드라마가 완성된다는 의미다. 마치 야구 경기가 우리에게 단순히 하룻밤의 게임이 아닌, 선수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연재 드라마로 여겨지듯이 말이다.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아리아를 끝내고 숨을 헐떡이며 쓰러져 있는 장면에서 박수갈채는 끊이지 않는다. 환호의 함성 속에 그 명가수는 옆에 같이 쓰러져 있는 파트너와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따가 끝나고 맥주 한잔?” 파트너는 대답한다. “오늘 아기 옆집에 맡겨 놔서 끝나자마자 바로 데리러 가야 해.” 청중들은 여전히 환호 중이다. 프로들이란 이렇다. 청중 입장에서 이 사실을 알면 괘씸하거나 얄미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그대로 죽을 똥을 싸며 스트레스 가득찬 공연보다 아이가 혼자 있어서 오늘 좀 빨리 끝내고 싶어서 빠르게 연주를 하는 공연에서 청중들은 열광하기도 한다.

프로는 청중을 울게 하지 본인이 울지 않는다. 하지만 그 무대를 위해 평소에 홀로 흘린 눈물은 셀 수 없을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그 ‘삶’이 그대로 연주에 반영되는 것이 프로의 경지가 아닐까.
2019-06-06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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