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를 열다] 1963년 6월 설탕 직매소 앞에 장사진 친 사람들

[DB를 열다] 1963년 6월 설탕 직매소 앞에 장사진 친 사람들

입력 2013-02-16 00:00
업데이트 2013-02-16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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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6월 8일, 서울의 어느 길거리. 길게 줄을 서서 사람들이 사려는 것이 무엇일까. 설탕이다.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입맛의 변화로 사람들은 단것을 찾기 시작했고 빵과 과자, 커피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설탕의 수요도 증가했다. 그러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설탕의 공급은 늘 부족했다. 특히 1962년 말부터 원료인 원당이 수입허가품목으로 바뀌고 외화 유출을 막고자 구매액이 대폭 삭감되었다. 이런 사정은 밀가루와 시멘트도 마찬가지여서 이른바 ‘3분(粉) 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설탕 제조업체는 제일제당과 삼양사 두 곳뿐이었다. 설탕의 수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당국은 가격을 통제할 목적으로 직매소를 두어 일종의 배급제를 시행했다. 서울에는 종로 5가 등 다섯 곳에 직매소가 있었다. 직매소에서는 가격을 당국이 정해 놓되 일정한 시간에 한 사람당 한 근(600g)만 살 수 있도록 했다. 설탕회사들은 가격을 통제받는 직매소에는 적은 양을 주고 그렇지 않은 대리점에는 물량을 많이 주었다. 당시 직매소 판매가격은 37원이었고 대리점을 통한 시중가격은 그보다 훨씬 높았다. 그러니 직매소에서 설탕을 파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기 마련이었다.

설탕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1960년대 초에 30㎏짜리 설탕 한 포대 값은 쌀 3가마 값과 비슷했다. 설탕값은 하루가 멀다 하고 올랐다. 1963년 6월 6일 오전까지만 해도 한 근에 50원 하던 것이 다음 날 75원으로 하루 만에 무려 50%나 뛰었다. 정부는 이듬해 설탕값을 시장 기능에 맡겨두려고 직매소를 폐지했는데, 설탕 한 근 값은 160원으로 두 배가 더 뛰었다.

설탕은 값만큼이나 귀한 존재였다. 1960년대 명절 선물 인기 순위 1번이었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듯 설탕물을 내놓기도 했다. 설탕 배급을 받으러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있었는데, 설탕 회사가 위로차 전달한 물건이 설탕이었다.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설탕의 역할을 대신한 것이 사카린이었다. 단맛이 설탕의 200배나 된다는 사카린은 1879년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의 아이라 렘센과 콘스탄틴 팔베르크라는 두 화학자가 연구 도중 우연하게 발견한 인공감미료다. 사카린은 발암물질로 분류되는 등 안전성을 놓고 늘 논란이 되어 왔다가 최근에야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2013-02-16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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