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제는 정책 토론을 시작할 시간/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시론] 이제는 정책 토론을 시작할 시간/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12-12-21 00:00
업데이트 2012-12-2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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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일류, 정치는 삼류”라는 편견을 잠시만 버리고 한국의 정치사를 되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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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의외로 우리는 매우 많은 것들을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이루어 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이래 우리의 정치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을 통해 탈이념적 외교의 근간을 마련했으며, 김영삼 정부의 군(軍)개혁과 금융실명제를 통해 문민통치와 조직적 부패 방지의 기틀을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가 만들어 낸 남북화해의 가능성과 노무현 정부의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 극복 역시 우리 정치가 일궈낸 중요한 자산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우연찮게도 우리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리더십이 항상 존재했다는 점이다. 군 및 여당 출신의 노태우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 시기에 자유롭게 북방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가능했을지 의문이며, 김영삼 대통령의 전격적인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군 개혁이나 금융실명제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들 또한 심심찮게 들린다. 북한을 대화의 테이블로 이끌어내고 한반도 평화 정착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만의 독특한 방식과 파격으로 정부의 문턱을 낮추고 대통령의 권한을 상당 부분 포기했던 것도 사실이다.

둘째, 우리는 위에 열거한 대통령들의 정치적 성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데 매우 인색했으며, 각 정권의 실정(失政)과 부패만이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정부이든 공과(功過)가 있는 것인데, 흥미롭게도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공(功)보다는 과(過)인 것 같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과거 정부의 레거시(legacy·유산)가 없다는 점이며, 이는 한국정치의 근본적인 비극일지도 모른다.

정권 교체, 나아가 시대 교체 등의 슬로건들이 난무했던 이번 선거 역시 과거의 정치를 부정하고 지워버려야만 현재의 정치가 살 수 있다는 한국정치의 기본적인 인식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 정권들의 정치적 상속자들이 주요 후보였던 이번 선거의 기본 구도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말들은 ‘혁신’과 ‘개혁’, 그리고 ‘미래’였다. 아마도 정권인수위원회가 출범하면 정부 부처 개편부터 시작해 시민들 삶의 구석구석까지 백지 위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새 정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들은 과거 정부들이 남긴 유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평가, 그리고 그 계승이라는 연장선상에서의 고민이어야 할 것이며, 이는 진보-보수 진영 간의 진정하고 솔직한 토론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치가 얼마나 발전하고 우리의 정책적 토론 기반이 얼마나 성숙했는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양대 후보 진영이 내놓은 공약과 정책들을 보면 매우 분명하다. 정치 개혁에서부터 경제정의나 복지, 그리고 지역발전 등의 공약에 이르기까지 정책적 논의들이 상당히 수렴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그 논의 수준 또한 몇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진전되고 구체화된 것이었다. 선거 국면에서는 그 디테일에 대한 차이점만이 강조되었고, 선거 후반 네거티브 공방에 후보들의 정책적 내용이 묻혀 버린 것도 사실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공통점을 찾아 나가는 정책적 토론의 가능성이 이번 선거만큼 열려 있었던 적도 없었다.

우리의 정치가 더 이상 삼류가 아닌 것은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성숙한 정치의식에 힘입은 바 크다. 기록적인 투표 참여를 통해서 그리고 선거과정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인 의견을 표출했던 우리 유권자들은 단순히 주어진 후보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 진영의 공약 수립과 선거운동 과정 구석구석까지 논평을 남기고 영향을 미쳤다. 선거라는 거대한 민주주의의 잔치가 끝나고 난 지금이야말로 본격적인 정책적 숙의가 시작되어야 할 시간이며, 이는 박근혜 당선인이 그리고 우리의 정치가 유권자들에게 진 빚이기도 하다.

2012-12-21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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