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리딩 프라미스/조태성 문화부 기자

[지금&여기] 리딩 프라미스/조태성 문화부 기자

입력 2012-07-14 00:00
수정 2012-07-14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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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공만 차고 다녔다. 우상은 대우 로얄즈의 삼손 김주성. 그 갈기머리를 따라하겠다고 우기다 등짝을 제법 맞았다. 학교 다닌 이유도 딱 하나다. 학교 가야 11명의 축구원정대가 구성되었으니까. 축구광이었으니 겨울이라고 내가 특별히 움츠러들 리 없었고, 나라고 겨울이 특별히 봐줄 리도 없었다. 콧물이 염주 매달리듯 얼면 곧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그때 허락받을 수 있는 유일한 외출 기회가 책방 나들이였다. 그 당시 집어들었던 책 가운데 하나가 필립 체스터필드의 ‘아들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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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성 문화부 기자
조태성 문화부 기자
사실 내용은 기억에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18세기 유럽을 그랑투어 중인 귀족집 도련님에게 주는 충고가 ‘흙투성이 김주성 키드’에게 뭐 그리 와닿았겠나 싶다. 무도회 매너가 어쩌고, 정장이 어쩌고 하는 낯선 내용들이었으니. 그럼에도 기억에 남은 이유는 순전히 읽어 주던 어머니의 낯선 반응 때문이다. “이제 저게 사람이 되려나.”가 아니라 “정말 좋은 책”이라며 약간 미안해하셨다. 부모가 좋은 말을 해 주지 못하니 이런 책을 골랐나 싶으셨던 모양이다.

지난 주말, 늘어지게 자는 아들 놈 옆에 누워 읽은 책이 ‘리딩 프라미스’(이은선 옮김, 문학동네 펴냄)다. 초등학교 사서인 아버지가 3218일간, 그러니까 10년 가까이 매일 밤 딸 앨리스에게 책을 읽어 줬다는 내용이다. 각 장마다 함께 읽은 책에서 따온 적당한 인용문이 있고 그간 가족들이 살아온 내용이 드라마틱하게 구성됐다. 문학소녀로 자란 딸답게 가난한 집안 형편, 부모님의 불화와 이혼, 그 와중에 겪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통 같은 얘기들을 웃기게 잘 버무려 놨다. 큭큭 웃다 부채질해 주던 부채 끄트머리로 몇번은 아들 놈을 쿡쿡 찌를 뻔도 했다.

다 읽고 나니 가슴 속에서 훅 불길이 치솟는다. 그래 사서 아버지가 앨리스에게 미안해하지 않았듯, 어머니도 내게 미안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나 역시 미안하지 않으려면 책을 읽어 줘야겠구나! 읽어 줄 만한 책을 찾아 재빨리 책장을 훑는데 17개월 된 아들 놈이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듯, 끄응 일어난다. 맘마나 내놓으란다. 눈치는 백단이다.

cho1904@seoul.co.kr

2012-07-1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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