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특급→먹튀→최고 아시아 선수

코리안특급→먹튀→최고 아시아 선수

입력 2010-10-02 00:00
업데이트 2010-10-0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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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안특급’ 박찬호(37.피츠버그 파이리츠)가 마침내 아시아 선수는 아무도 오르지 못했던 고지에 홀로 우뚝 섰다.

 박찬호는 2일(한국시간) 미국 마이애미에서 계속된 미국프로야구 플로리다 말린스와 방문경기에서 3-1로 앞선 5회말 등판해 3이닝 동안 피안타 없이 무려 삼진 6개를 솎아내며 무실점으로 막는 완벽투를 선보이고 구원승을 챙겼다.

 메이저리그에서 17시즌 만에 챙긴 개인통산 124승째.

 이로써 박찬호는 은퇴한 일본인 투수 노모 히데오(통산 123승)를 제치고 메이저리그의 아시아 출신 선수 통산 최다승 기록을 새로 썼다.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해 17시즌을 뛰면서 467경기(선발 287경기)에 출전한 끝에 달성한 대기록이다.

 이날 승리를 시작으로,앞으로 박찬호가 올리는 승리는 모두 당분간 깨지기 어려운 ‘새 역사’로 남게 됐다.

 ●불안하던 강속구 투수,메이저리그를 호령하다

박찬호가 공주고와 한양대를 졸업하고 1994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랫동안 뛰면서 새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주목한 이는 드물었다.

 공주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박찬호는 대학 최고의 강속구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지만,제구력 등 안정적인 면에서는 임선동(전 현대)이나 조성민(전 한화) 등 ‘최고’로 꼽히던 동기들보다 약간 낮은 평가를 받았다.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을 때에도 한국인 선수 중에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개척자’로서의 가치가 주목받는 정도였다.

 그러나 박찬호에게는 생소한 미국 생활을 이겨낼 만한 뚝심과 성실함이 있었다.

 미국 문화와 여러 차례 충돌해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만들어내면서도 박찬호는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으며 화려한 선수 생활을 준비했다.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첫해부터 곧장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박찬호는 첫 2년 동안은 승수를 올리지 못했지만,1996년 5승(5패)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활약을 시작했다.

 1997년 14승(8패)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두자릿수 승리를 달성한 박찬호는 이후 2001년까지 5년 연속으로 두 자리 승수를 올리면서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를 굳혔다.

 특히 2000년에는 무려 한 시즌 개인 최다인 18승(10패)을 올리고 삼진 217개를 잡아내면서 평균자책점 3.27을 기록해 최고의 해를 보냈다.

 단순히 많은 승리를 올린 것만이 아니었다.

 철저한 ‘이방인’으로 출발했던 박찬호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어느새 팀 분위기를 주도하는 ‘라커룸의 리더’로서도 인정받는 중견 투수로 성장했다.

 박찬호는 2001년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무려 6천500만 달러를 받으며 선수 인생의 정점을 찍었다.

 ●정상에서 찾아온 시련…‘오뚝이 인생’의 시작

그러나 인생 최고의 시기에 시련이 닥치면서 부진과 재기를 거듭한 ‘오뚝이 인생’이 시작됐다.

 2002년 9승(8패)에 그치면서 주춤한 박찬호는 이듬해 허리 부상의 여파로 고작 7경기에 나와 1승(3패)을 거두는 데 그쳤고,2004년에도 4승(7패)밖에 올리지 못해 ‘먹튀’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옮긴 2005년 마침내 통산 100승 고지를 밟고 시즌 12승을 거두면서 부활하는 듯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006년 샌디에이고에서 7승을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매년 팀을 옮겨 다닌 탓에 마음 놓고 성적을 올리기보다는 팀에서 자리를 잡으려 애써야 하는 날이 많았다.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잔 부상이 많아져 좋은 흐름이 끊긴 것도 여러 번이었다.

 뉴욕 메츠로 옮긴 2007년에는 한 경기에 등판에 4이닝 동안 무려 7점이나 내주며 패전 투수가 되면서 더는 기회를 잡지 못했고,다저스로 돌아간 2008년에는 4승을 올리는 데 그쳤다.

 7년 만에 돌아온 친정팀 다저스는 박찬호 선수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본격적으로 중간 계투 보직을 맡기 시작해 평균자책점 3.40의 좋은 성적을 냈다.

 하지만 선발 투수 자리를 포기할 수 없던 박찬호가 먼저 팀을 떠났다.

 선발 투수로 재기하고자 이듬해 필라델피아로 팀을 옮겼지만,박찬호는 결국 선발진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중간 계투로 주로 나서면서 3승을 올렸다.

 계투진의 일원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는 감격을 누린 박찬호는 이번엔 첫 우승의 꿈을 좇아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다시 찾은 뉴욕은 여전히 박찬호에게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박찬호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27경기에 나와 2승(1패),평균자책점 5.60에 그쳤고,결국 구단에서 방출 대기 조치를 당했다.

 자칫 소속팀 없이 시즌을 마쳐야 할 위기에까지 몰렸던 박찬호는 가까스로 피츠버그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잔류했다.

 ●‘긍정의 힘’으로 이겨낸 시련

“내 인생에 불행은 없었다”성적의 부담 없이 던질 수 있었던 피츠버그는 박찬호가 다시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좋은 무대였다.

 박찬호가 수없이 시련을 겪으면서도 다시 재기에 나설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는 역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었다.

 박찬호는 2002년 텍사스에 입단하면서부터 주기적으로 허벅지와 허리 등을 다쳤고,2006년에는 심한 장 출혈 증상에 고생하는 등 끊임없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내 인생에 불행은 없었다”는 본인의 말처럼 갑작스레 닥쳐온 시련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이며 극복해냈다.

 박찬호는 우여곡절 끝에 피츠버그로 팀을 옮기면서 “큰일을 위해 하늘에서 마음을 다시 제대로 잡고 가라고 하셨나 보다”라는 말을 남기고 새로운 도전을 다짐했다.

 메이저리그 최하위 구단에 여전히 보직은 중간 계투로 자신이 꿈꾸던 모습은 아니었지만,목표를 이루겠다는 다짐 하나로 묵묵히 던졌다.

 초반 불안하던 모습을 딛고 8경기 연속 무자책점 행진을 벌이는 등 다시 안정을 회복한 박찬호는 결국 13일 신시내티와 원정 경기에서 극적인 구원승을 따내며 통산 123승으로 노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어 19일이 흐른 이날 박찬호는 시즌 종료를 앞두고 마침내 1승을 추가하며 메이저리그의 ‘최고 아시아 선수’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고 말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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