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관행으로 만연…처벌 강화하고 문화 개선해야”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를 착취하고 인격적 모멸감을 주는 ‘갑(甲)’의 구태가 끊이지 않고 있다.대형약국을 운영하며 거래처 직원을 머슴처럼 부린 약사 부부, 용역기관에 휴양시설 스파 이용 등 편의를 봐달라고 한 공무원, 관광객 쇼핑 유도 실적이 부족한 가이드에게 벌금을 물린 여행사 대표 등 갑질이 곳곳에 만연해있다.
지난 2년간 의료품 도매업체 영업사원 A(30)씨의 일터는 회사가 아닌 광주 동구의 한 대형약국이었다.
대학병원 길목에 자리한 이 약국은 제약회사와 도매상 사이에서 ‘큰 손’으로 통했다.
직원 20여명을 둔 약사 부부는 A씨 회사에서 매달 10억원 가량의 약품을 사들였다.
A씨의 일과는 오전 8시께 약국 셔터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가 화분을 바깥으로 내놓고, 카펫을 깔고, 청소하는 동안 약국 직원들의 출근이 이어졌다.
A씨는 약사 부부가 나오면 차를 주차장에 갖다 놓고 돌아와서 출출한 오후에 간식을 사 오는 일이나 은행 업무, 담배 심부름까지 떠안았다.
중학생, 초등학생 아들의 학원 통학과 휴일에 이삿짐 나르기, 가구 재배치 등 약사 가족의 사적인 일에도 A씨는 동원됐다.
A씨 회사의 임원과 동료들은 2009년 11월부터 2∼3명씩 약국에 상주하며 허드렛일을 도맡아왔다.
업체 직원이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거나 부당함을 제기하면 부부는 ‘거래처를 바꾸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광주 서부경찰서는 약사 부부를 강요 혐의로 형사 입건했다고 6일 밝혔다.
부부는 경찰 조사에서 “이런저런 일을 시키거나 부탁한 것은 맞지만, 업체 직원들 스스로 우리를 도왔다”고 주장했다.
충남 천안의 보건소 직원 3명은 용역수행을 감독하던 올해 6월 스파 이용료와 식사비를 내지 않고 휴양을 즐겼다.
이들의 비용은 스파를 이용한 시민의 체험 결과 보고서 작성 용역을 맡은 한방병원이 용역사업비로 대신 냈다.
한 간부 공무원은 여름철 성수기를 맞은 8월에 콘도미니엄 수요가 폭주해 투숙이 어려울 것으로 보이자 한방병원 측에 프로그램을 공동 운영하는 리조트에 객실을 예약해달라고 부탁했다.
이후로도 공무원들의 요구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한방병원에 부서 워크숍을 할 테니 45평형 객실 2개를 예약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약 객실은 워크숍이 예정된 10월 들어 돌연 취소됐다.
한방병원 측은 국민권익위원회에 공무원들의 비위 사실을 제출할 계획이다.
올해 8월 부산에서는 관광 가이드를 갈취한 여행사 대표 2명이 경찰에 입건됐다.
대표는 중국인 관광객의 절반 이상이 건강 보조식품 판매장에서 물건을 사지 않으면 관광객 1인당 1만원의 벌금을 내도록 했다.
그는 쇼핑 수수료를 많이 챙기려고 이 같은 갑질을 했는데 넉 달간 가이드 5명으로부터 15차례에 걸쳐 360만원을 가로챘다.
또 다른 대표는 가이드 15명이 중국인 관광객을 안내하면서 낸 밥값과 입장료 등 2천600만원 지급을 모른 척하다 적발됐다.
김동헌 광주경실련 사무처장은 “부정청탁금지법을 만든 근본적 목적은 우리 사회에서 갑질을 척결하기 위한 것”이라며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갑질의 뿌리가 너무 깊이 내렸다. 개별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문화적 개선을 위한 정책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