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 수도’ 부산, 그 시절 삶의 내음들

‘피란 수도’ 부산, 그 시절 삶의 내음들

송한수 기자
송한수 기자
입력 2016-11-10 22:24
업데이트 2016-11-1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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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1023일간 수도 역할…천막교실 등 희귀사진 63점 발굴

6·25전쟁 때 국군은 나흘째인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내준 뒤 남쪽으로 밀려 내려갔다. 정부는 급기야 그해 8월 18일 서울을 버리고 지금의 부산시 서구 부민동 구덕로에 초라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국제연합(UN)군은 한달 뒤인 9월 15일에야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에 상륙해 대반격을 폈다. 마침내 28일엔 서울을 탈환했다. 정부는 다시 둥지를 서울 광화문 옆에 틀었고, 유엔군은 10월 13일 평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중국의 개입으로 전쟁은 ‘38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업치락뒤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학습효과에 따라 정부는 일찌감치 이듬해 1월 4일 다시 부산을 임시수도로 삼았다. 정전협정을 맺은 1953년 8월 15일까지 부산은 두 차례를 통틀어 전쟁 기간인 1129일 중 1023일 동안 수도 역할을 했다. 대통령 관저와 입법·사법·행정기관이 모여 있었다. 현재 동아대가 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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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이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전후 부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한 사진. 종전 뒤인 1954년 광복동 거리의 평화로운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국가기록원이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전후 부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한 사진. 종전 뒤인 1954년 광복동 거리의 평화로운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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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이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전후 부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한 사진. 전쟁 탓에 갑자기 불어난 인구로 부족해진 교실 대신 천막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던 당시 초량동 항도초등학교. 국가기록원 제공
국가기록원이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전후 부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한 사진. 전쟁 탓에 갑자기 불어난 인구로 부족해진 교실 대신 천막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던 당시 초량동 항도초등학교. 국가기록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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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이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전후 부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한 사진. 전쟁 초기이던 1950년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국가기록원이 6·25전쟁 당시 임시수도 전후 부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로 평가한 사진. 전쟁 초기이던 1950년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원과 부산발전연구원은 ‘피란수도 부산 기록 찾기 공모전’에서 희귀사진 63점을 발굴했다고 10일 밝혔다. 공모전은 6·25전쟁 때 임시수도 정부청사로 쓰였던 경남도청 등 ‘피란수도 부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자 필요한 기록물을 찾기 위해 올해 8∼9월 진행됐다.

국가기록원은 응모 사진들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자료를 찾아냈다. 1953년 1월 발생한 부산 국제시장 화재 사건 이전의 시장 모습은 매우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됐다. 국제시장 사진을 제출해 최우수작에 선정된 이송연(88)씨는 “전쟁 발발로 함경남도 함흥에서 혼자 내려와 틈틈이 촬영한 사진을 장롱에 간직하다가 피란수도 기록을 찾는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출품했다”며 원본을 모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2016-11-1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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