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사망] 北선 ‘주체사상 대부’… 망명후 北체제비판 저격수로

[황장엽 사망] 北선 ‘주체사상 대부’… 망명후 北체제비판 저격수로

입력 2010-10-11 00:00
업데이트 2010-10-1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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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씨 파란만장했던 삶

북한의 ‘주체사상 대부’로 불리던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는 고(故) 김일성 주석의 손자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 65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 후계 공식화 선언을 마무리한 10일 세상을 떠났다.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 인사 가운데 최고위층으로 10여년간 한반도와 주변국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그는 자신이 만든 ‘주체사상’이 3대(代) 세습의 버팀목이 되는 모습을 보며 쓸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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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전 숨진 채 발견될 당시까지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살았던 서울 논현동의 안전가옥. 폐쇄회로(CC)TV를 가동하는 등 외부와 차단돼 있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10일 오전 숨진 채 발견될 당시까지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가 살았던 서울 논현동의 안전가옥. 폐쇄회로(CC)TV를 가동하는 등 외부와 차단돼 있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김일성 부자의 정신적 선생

87살로 사망한 황 전 비서는 1923년 2월 평안남도 강동에서 태어났다. 1949년 구 소련의 모스크바대학 철학부를 졸업한 유학파로 1970년대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해 ‘김일성주의’로 발전시켰다. ‘주체사상의 대부’로 불리게 된 계기다.

그는 1965년 김일성 대학의 총장에 오른 뒤 김 주석의 뒤를 이어 권력을 물려 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체사상 개인교사가 된다. 김일성 부자의 사상적 기틀이 돼 준 셈이다. 그는 김 부자의 절대적 신뢰 속에 해외 주체사상연구소를 설립하고 제3세계로의 주체사상 전파에 앞장섰다. 특히 김 위원장의 백두산 출생설을 포함해 후계자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도 그다. 김일성 부자의 신뢰는 황 전 비서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세 차례나 지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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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북한의 월간지 ‘천리마’ 1987년 1월호에 실린 김일성(왼쪽 첫번째)과 김정일(오른쪽 첫번째), 황장엽(원안)의 사진. ② ‘천리마’ 1987년 7월호에 실린 김일성(오른쪽). 제5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석해 황장엽(왼쪽 두번째) 전 비서의 안내를 받아 예술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③ 황장엽(가운데) 전 비서가 1994년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7차 회의를 주석단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진은 그 해 북한의 월간 화보 ‘조선’ 6월호에 실렸다. ④ 황장엽 전 비서가 망명 전 북한에 있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① 북한의 월간지 ‘천리마’ 1987년 1월호에 실린 김일성(왼쪽 첫번째)과 김정일(오른쪽 첫번째), 황장엽(원안)의 사진. ② ‘천리마’ 1987년 7월호에 실린 김일성(오른쪽). 제5차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석해 황장엽(왼쪽 두번째) 전 비서의 안내를 받아 예술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③ 황장엽(가운데) 전 비서가 1994년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9기 7차 회의를 주석단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진은 그 해 북한의 월간 화보 ‘조선’ 6월호에 실렸다. ④ 황장엽 전 비서가 망명 전 북한에 있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1984년 김 주석의 중국방문을 단독 수행하면서 대외 활동에서도 최고위층으로서 면모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1993년 말부터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으로 당차원의 외교를 맡기도 했다. 대내외 중요 임무를 독식한 셈이다.

하지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국제담당 비서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을 겸하며 최고위층으로 자리잡고 있던 황 전 비서는 1997년 2월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망명을 결심한 결정적 이유에 대해 자신이 이론화해 체계화시킨 주체사상과 관련해 김 위원장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으로 전했다. 황 전 비서의 고민은 1990년대 중반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강연회나 세미나에서 밝힌 의견에서도 드러난다. 199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그는 “주체사상은 (김일성 사상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으로 한 인본사상이다.”라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반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런 그의 발언들은 평양에 보고됐고 위험을 감지한 황 전 비서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활발한 반북활동

북한의 방해 공작, 중국의 제3국으로 떠날 것에 대한 조치 등 우여곡절 끝에 남한으로 망명하게 된 황 전 비서는 이후 대표적인 반북인사로 활동한다.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 체제가 김일성 시대보다 독재의 정도가 10배는 강하다고 비판하고 반역자는 국민을 굶어 죽게 하는 김정일이라고 말하는 등 정권 세습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이어갔다.

이 때문에 북한은 여러 차례 황씨를 암살 계획을 세워 틈을 노려왔다. 올해 초 황씨를 살해하기 위해 침투했던 북한의 전문 암살조가 국정원과 검찰의 수사로 체포된 것도 이를 방증하는 모습이다. 이런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의 체제 비판 강도를 높여오던 황 전 비서였지만 세월에는 버틸 수 없었다. 10일 북한 체제변화라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2010-10-11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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