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등대의 변신] 국내 첫 근대식 등대 팔미도 등대

[커버스토리-등대의 변신] 국내 첫 근대식 등대 팔미도 등대

입력 2013-07-20 00:00
업데이트 2013-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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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 꾀한 일제 강요로 건설…인천상륙작전땐 길잡이 역할…2003년 임무 마치고 영구보존

‘외로운 사람이 등대를 찾는다/등대는 별에서 오는 편지와/별에게 보내고 싶은 편지를/놓아두는 우체통이다/그래서 사람들은/혹시나 하고 등대를 찾아가고/별에게 보낼 편지를 넣으려고/여름새벽하늘색/등대를 찾아간다’ 바다의 시인 이생진(84)은 이렇게 노래했다. 등대는 늘 고독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근대식 등대도 국가 암흑기에 첫발을 뗐다. 현재 인천 중구 무의동 산 373번지 팔미도에서다. 인천공항 옆 무의도에 딸린 무인도에 등대가 들어선 지 어언 110년이다. 1903년 6월 1일 첫 불을 밝혔다. 높이 7.9m 지름 2m다. 해발 71m에 우뚝 섰다. 처음엔 90촉광 석유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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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팔미도 등대.
한국 근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팔미도 등대.


여기엔 뼈아픈 일이 숨었다. 침략을 꾀한 일제가 어서 건설하라고 윽박질렀다. 한성(서울)으로 가는 길목이지만 낯설어 항해가 버거웠다. 등대 관련 업무를 38년째 맡고 있는 해양수산부 해사안전시설과 김민철(57) 서기관은 “일본도 1850년대 프랑스로부터 등대를 세우라는 압력을 받았다”면서 “그렇게 겪은 슬픔을 우리에게 똑같이 강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쁨도 얽혔다. 1950년 9월 15일이다. 6·25전쟁 대북 첩보를 담당한 ‘켈로’(KLO·Korea Liaison Office) 부대원들이 등대를 탈환해 불을 밝힘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이끌며 길잡이 노릇을 해냈다. 그리고 2003년 임무를 내줬다. 한 세기를 맞아 영구 보존 대상에 오른 ‘귀하신 몸’이다. 위성항법 위치정보 송출장치 등 첨단 장비와 등탑·전망대를 갖춘 높이 31m의 새 등대가 대신한다.

외롭게 길목을 지키는 등대원의 고생은 옛날에도 적잖았다. 1960년 5월 서울신문 ‘나의 호소’ 코너에는 ‘고해(孤海)의 등대수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건네자’는 제목의 기고가 실렸다. 서울 성북동에 산다는 독자는 “특히 인천 연평도 등대는 목전에 휴전선을 둔 요지인 데다 연간 수만t에 이르는 어획고를 올리는 국내 유일의 어장을 곁한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반도에서 역사적인 첫 항로표지 기록은 196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48년 가락국이다. 삼국유사에 불을 피워 들어오는 선박을 인도했다고 적혔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2013-07-2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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