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벽화고분 10기 조명
고구려 벽화고분/전호태 지음/돌베개/448쪽/3만 5000원쌍영총,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장천1호분, 개마총…. 많은 이들이 역사책에서 만났을 고구려 벽화고분들이다. 그런데 이 고분들에 대한 일반 인식은 이름과 존재의 알음 수준에 머물러 있고 학계의 연구 진전도 그 일천함을 크게 넘지 못한다. 이 책에선 30년 넘게 고구려 벽화고분에 천착한 울산대 교수가 절박함을 토로해 눈에 띈다. ‘고분벽화는 종교·신앙의 세계를 담은 동시에 무덤 주인이 살던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그림’ 그 정의대로 저자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세계관, 내세관까지 고스란히 담아낸 타임캡슐로 본다. 그리고 그 타임캡슐을 미술영역에 가두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벽화고분 10기의 양식 발전에 얹어 당대의 정세며 역학관계를 세밀하게 들춰 흥미롭다.
고구려 초기 무덤 양식을 보여 주는 덕흥리벽화분 속 벽화. 중국 영향을 강하게 받은 벽화로 무덤 주인공의 위상을 과장되게 묘사한 화풍이 눈에 띈다.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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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에 조성된 수산리벽화분 벽화 속 귀부인. 전성기 고구려 문화의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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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무덤 개마총 벽화에 담긴 인물 행렬. 사회혼란을 반영한 때문인지, 무덤을 주인공으로 하는 듯한 행렬이 어디로 향하는지 확실치 않다.
돌베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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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멸망 무렵인 7세기 전후의 후기 무덤 속 벽화들은 사신도 일색이다. ‘사신도 무덤’으로 불리는 개마총, 진파리1호분, 통구사신총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 사신도들은 화려하지만 일관성과 방향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수왕 서거 후 피지배층의 불만과 불안이 곳곳에서 피어났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현미경 들이대듯 구조, 양식의 변화상을 세밀하게 풀어 놓는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고분들에 스며 있는 개연성에 자연스럽게 눈뜨게 된다. 북에서 1949년·1957년 발굴한 안악3호분과 1976년 수습한 덕흥리벽화분은 대표적 사례이다. 무덤 주인공에 따라 고구려가 지금의 베이징, 서쪽으로 시안까지 이어지는 유주지역의 지배 여부를 가릴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안악3호분 한문 묵서명 속 ‘동수’라는 인물이 당시 전연의 왕위계승 다툼에서 밀려나 고구려로 망명한 장군 동수와 같은 인물인지, 고구려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인지를 따지는 논쟁이 진행 중이다. 덕흥리벽화분 묵서명 속의 유주자사 진이라는 무덤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북중국 왕조 관료였는지 고구려 출신 대귀족이었는지도 결론짓지 못한 상태이다. 그 결정에 따라 고구려 영역이 크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벽화고분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1000년 넘게 잊혔던 문화유산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될 무렵 벽화 속 그림이 알려져 뒤늦게 관심을 끌게 됐고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과 2004년 북한·중국 소재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화제가 됐다. 하지만 고구려 벽화고분을 중심 연구과제로 삼은 연구자는 국내외를 통틀어 몇 손가락에 꼽힐 정도라고 한다. “고대의 특정시기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뛰어난 미술이자 건축물이 광범위한 지역에 이토록 많이 다채롭게 남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라는 저자는 이렇게 안타까움을 털어놓는다. “여전히 기초 조사와 발굴보고 정리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유물들은 급속도로 훼손되어 가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2016-08-20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