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대표한 인물…박학다식한 사회참여적 지식인의 표상
첫 장편 ‘장미의 이름’은 현대의 고전“저는 13세에 스탕달에 빠졌고, 15세에는 토마스 만에 매혹됐죠. 16세엔 쇼팽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을 탐구하느라 평생을 보냈죠. 당신이 살아가면서 사물들과 상호작용한다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바보죠.” (독일 슈피겔지와 인터뷰에서)
19일(현지시간) 향년 84세로 타계한 움베르토 에코는 명실 공히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불렸다.
에코는 세계적인 기호학자이자 소설가, 중세사가, 철학자, 미학자였다. 그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영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했고, 독일어·스페인어·라틴어·러시어 등은 불편 없이 쓸 수 있었다.
미학·기호학·문학·문화 비평 등을 넘나들며 경이로운 저술 활동을 벌였던 그의 박학다식함 앞에 여러 지식인은 무릎을 꿇었다. 에코는 ‘지식계의 T-Rex(티라노사우루스)’로 불릴 만큼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고, 그로부터 깊이 있는 글들을 쏟아냈다. 축구, 택시, 포르노, 커피잔 등을 주제로 유머러스한 글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미학의 문제’·‘기호학 이론’·‘해석이란 무엇인가’ 등의 학술서와 ‘글쓰기의 유혹’·‘매스컴과 미학’ 등의 문화비평서, ‘폭탄과 장군’·‘세 우주 비행사’ 등 동화까지 수십 권의 책을 썼다. 그러나 에코를 전 세계적으로 알린 것은 그의 나이 48세에 처음 쓴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이다.
1980년 이탈리아 출간된 ‘장미의 이름’은 중세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중심을 이루는 추리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윌리엄과 아드소가 수도원에서 보내는 일주일간의 생활을 통해 중세의 생활상과 세계관, 각 교파 간의 이단논쟁과 종교재판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종교적 독선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던 14세기 유럽의 역사를 생생하게 되살린 소설은 40여국에 번역돼 2천만부 이상이 팔렸다. 또 프랑스의 메디치 외국문학상과 이탈리아 스트레가상도 수상했다.
‘장미의 이름’은 출판사 열린책들이 1986년 한국에서 처음 출간했다. 책은 장 장크 아노 감독이 만든 동명 영화가 연이어 개봉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고, 열린책들이 대형 출판사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책의 인기에는 2010년 별세한 번역가 이윤기 씨의 역할이 컸다. ‘장미의 이름’ 문장 곳곳에는 이씨의 재치가 빛난다. 그는 옮긴이와 옮기는 과정에 훈수를 둔 이의 후기까지 책에 담았고, 보시·탁발·고승대덕·운수행각 등 불교 용어를 유럽 수도승의 이야기에 적절히 활용해 독자의 이해를 높였다.
에코의 두 번째 소설 ‘푸코의 진자’도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공헌했다. 한국에서는 1990년 ‘푸코의 추’란 제목으로 처음 출간됐다. 이윤기가 역시 번역을 맡았다.
1988년 발표된 ‘푸코의 진자’는 에코의 기호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죽음과 삶의 문제, 악마주의와 구원 등의 문제를 다룬 소설은 내용의 파격성으로 인해 독자들과 평론가들의 절대적 찬사를 받았다. 동시에 교황청으로부터 신성모독의 내용으로 가득 찬 쓰레기라는 혹평을 받으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책은 세계 여러 매체에서 ‘1989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됐다.
에코의 저서를 대부분 출간한 열린책들은 2004년 에코가 50여년간 출간한 철학·기호학·문학 이론·문화 비평 도서들을 모아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을 펴내기도 했다.
열린책들의 안성열 편집주간은 “에코는 인문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현상’같은 인물”이라며 “전 세계 어느 누구도 그가 세계의 지성이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그의 글들에는 촌철살인의 유머가 살아있고, 냉소·아이러니가 넘쳐난다”며 “그러면서도 현실정책에 깊숙히 개입해 발언하는 모습은 사회참여 지식인의 면모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안 편집주간은 “1986년 열린책들은 ‘고급소설 읽기의 재미를 알린다’는 취지로 ‘장미의 이름’을 출간했다”며 “이후 50여권의 에코 저서를 출간했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