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가방끈 따위’ 이론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가방끈 따위’ 이론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

임병선 기자
입력 2020-03-03 11:42
업데이트 2020-03-03 11:42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옛적 로마에서는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메멘토 모리!”라고 외치게 했다.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에게도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넌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으니,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라”는 가르침이 전해진다. 죽음이 곧 삶이다. 의미있는 삶을 마치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의 자취를 좇는다.
AFP 자료사진
AFP 자료사진
양자 전기역학의 기반을 닦은 이론 물리학자이자 과학에 관한 다양한 대중서를 집필한 프리먼 J 다이슨 박사가 지난달 28일(이하 현지시간) 9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고인은 특히 박사학위를 따지 못하고도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 선 인물로 기억된다.

영국 태생의 다이슨이 60년 이상 몸담은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AS)는 2일에야 그의 죽음을 뒤늦게 전하며 “인간과 양자 세계를 잇는 계산을 포함한 혁명적인 과학적 통찰력으로 핵공학과 고체물리학, 페로 자성(磁性), 천체물리학, 생물학, 응용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딸 미아는 미국 일간 메인 퍼블릭에 부친이 연구실에 출근하던 도중 실신해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고 비즈니스 인사이더가 전했다.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을 전공하던 다이슨은 2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공군 폭격기사령부에서 수학을 응용해 폭격 계획을 짜는 일을 했다. 종전 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미국 코넬대학 대학원에 진학해 원자폭탄을 비밀리에 제작하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끈 한스 베테 교수에게서 물리학을 사사했다. 이 때 빛이 물질과 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이해를 심화하는 기념비적인 논문을 발표했다. 전자와 광자의 움직임을 기술하는 리처드 파인먼 당시 코넬대 교수의 방식과 그 대척점에 있던 줄리언 슈윙거 하버드대 교수의 방식이 종국에는 같다는 점을 증명해냈다.

현대과학에서 손꼽히는 업적 중 하나인 양자 전기역학(QED)에 관한 이 논문은 동료들 사이에서 노벨상을 탈 만한 가치가 있는 논문으로 평가됐다. 파인먼과 슈윙거 교수는 1965년에 일본 물리학자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郞)와 함께 양자 전기역학에 관한 학문적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지만 다이슨의 이름은 없었다.

그는 나중에 “노벨상을 바란다면 예외 없이 10년 이상 중요하고 심오한 문제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난 그런 유형이 아니다”고 돌아봤다.

다이슨은 학문의 테두리를 뛰어넘어 우주탐사 분야의 다양한 제안과 대중적인 과학 책 출간으로 이름을 더 널리 알렸다. 핵 추진 대형 탐사선으로 태양계 행성을 탐사하는 오리온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유전자를 조작한 식물을 심어 외계 식민지를 구축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항성의 복사 에너지가 행성계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이를 완전히 둘러싸는 거대 구조물을 만들어 항성의 복사 에너지를 받아쓰는 ‘다이슨 스피어’(Dyson sphere)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고등 기술 문명의 필연적 귀결로 지적하며 지적인 외계생명체를 찾는 길로 연결했다.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 세트로 다이슨 스피어가 등장함은 물론이다.

다이슨은 55세 때 ‘에로스에서 가이아까지’(From Eros to Gaia)를 시작으로 ‘과학은 반역이다(The Scientist as Rebel),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Disturbing the Universe) 등 다양한 대중 과학책을 냈다. 2000년에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다룬 ’종교에서의 진보‘(Progress in Religion)로 종교활동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는 템플턴 상을 받기도 했다.

1967년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의 원자폭탄 이용 방안에 자문했고, 2015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과 핵 합의에 힘을 실어준 과학자 29명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다채로운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았는데도 코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지는 못했다. 박사과정 중 코넬대 교수로 임용됐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맞지 않는다며 2년 만에 IAS로 옮겼으며,평생 박사학위가 없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고인은 2009년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자들의 예견 모델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일간 뉴욕 타임스(NYT) 잡지에는 일련의 기고를 연재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되레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고 빙하기가 다시 도래하는 일을 막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2015년 공영 NPR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선 “난 기후 재앙이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재앙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털어놓았다.

유족으로는 64년을 함께 지낸 미망인과 여섯 자녀를 남겼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많이 본 뉴스
공무원 인기 시들해진 까닭은? 
한때 ‘신의 직장’이라는 말까지 나왔던 공무원의 인기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올해 9급 공채 경쟁률은 21.8대1로 3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공무원 인기가 하락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낮은 임금
경직된 조직 문화
민원인 횡포
높은 업무 강도
미흡한 성과 보상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