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은 거대한 부실집단, 관료주의의 블랙홀”

“유엔은 거대한 부실집단, 관료주의의 블랙홀”

입력 2016-03-22 15:39
업데이트 2016-03-22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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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고위관리 “직원 한 명 채용에 213일 걸려” “유엔은 스마트폰 시대의 타자기” 신랄 비판

“세상은 스마트폰 시대인데 유엔은 레밍턴 타자기 시대에 머물러 있다.”

30년 가량 유엔에서 근무하며 에볼라 퇴치 현장 책임자 등을 지낸 뒤 지난 2월 사임한 앤서니 밴버리 전 사무차장보(ASG)가 유엔의 관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고별사를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파문이 일고 있다.

‘나는 유엔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 조직은 지금 망가지고 있다’는 제목의 이 기고문은 “유엔 시스템은 수많은 돈과 인간의 열망을 모두 흡수해서 한순간에 사라지게 하는 거대한 ‘관료주의의 블랙홀’”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꼽은 유엔의 최대 문제는 인사 시스템이다. 가장 유능한 인재를 영입해 신속히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할 유엔이 사람 한 명 채용하는데 평균 213일이 걸린다는 것이다. 어떤 일의 적임자를 신속히 채용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엔의 규칙을 어기는 것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그는 유엔 에볼라 대응팀의 수장으로 아크라에 갔을 때 인류학자 한 사람을 독립 계약직으로 현장에서 채용한 사실을 소개했다. 그 인류학자는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의 매장 관습, 즉 매장하기 전 고인의 친척들이 시신을 만지는 풍습으로 인해 감염자가 늘고 있음을 파악해 냈다. 원인을 밝힌 뒤 해당 정부를 설득해 에볼라로 숨진 시신을 화장하도록 하면서 감염자는 줄어들었지만, 그 인류학자는 자신이 대응팀장에서 물러난 뒤 곧바로 해임됐다는 것이다.

수십억 달러를 사용하는 평화유지군의 수장들조차도 당장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거나 해임할 권한이 없다. 누가 봐도 무능한 사람일지라도 일단 임명되면 ‘중대한 범죄행위’가 없는 한 해임이 불가능한 것이 유엔 조직의 실체다. 그야말로 ‘철밥통’ 유엔인 셈이다. 밴버리는 “지난 6년 동안 실적이 저조하거나 무능한 현장 책임자나 직원이 해임되거나 징계를 받은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인사 문제에 이어 두 번째로 심각한 유엔의 병폐는 중요한 문제들이 유엔의 가치나 현장의 필요성에 의하지 않고 정치적 편의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가령, 아이티의 경우 지난 10년 동안 아무런 무력충돌이 없는데도 4천500명의 불필요한 전투병력을 주둔시키는가 하면, 심각한 내전 상태인 말리에 1만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했지만, 그 가운데 80% 이상이 비전투병력이어서 수많은 유엔군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이라고 한다. 심각한 인권유린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악명을 떨쳐온 콩고민주공화국 군인들을 적절한 논의도 없이 평화유지군에 참여시킴으로써 수많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여성들이 강간 피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밴버리는 “많은 사람이 유엔의 관료주의가 평화유지 노력을 훼손시키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그들은 유엔이 실패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나는 세계를 위해 유엔은 꼭 성공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조언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충정을 강조했다.

밴버리의 기고문이 나가자 로이터, 가디언, 포천, NBC 뉴스 등 미국의 주요 매체들이 앞다퉈 보도하면서 유엔 개혁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유엔 내에서는 ‘내부자 고발’이냐는 까칠한 반응도 있지만, 30년간 유엔에서 근무하면서 조직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밴버리의 지적이 뼈아프다는 시각이 다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엔 디스패치’의 마크 레온 골드버그는 “핵심은 이 신랄한 조언이 유엔 개혁이 실현될 수 있도록 (회원국) 외교관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점”이라며 “문제는 외교”라고 말했다.

유엔의 인사 시스템은 반기문 사무총장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총회에서 쿼터 시스템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이 시스템은 선진국 출신의 주요 기구 독점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됐지만, 지금은 회원국들의 부적절한 인사개입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골드버그가 ‘문제는 외교관들’이라고 한 이유도, 유엔 주재 회원국 대표들의 각성을 우회적으로 촉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밴버리는 기고문의 마지막에 “반기문 사무총장은 매우 신실한 사람이며 유엔에는 똑똑하고 용감하고 이타적인 분들도 많이 있지만, 도덕적 소양과 업무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면서 새로운 사무총장이 들어서면 더욱 강도 높은 유엔 사무국 개혁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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