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섶에서] ‘행동하는 양심’/손성진 논설고문

[길섶에서] ‘행동하는 양심’/손성진 논설고문

손성진 기자
입력 2019-06-13 17:32
업데이트 2019-06-14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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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데 행동에 옮기지 못한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 쳐도 실천하지 못하는 나를 탓하고 싶다. 옹졸하고 이중적인 셈이다.

좌판을 벌여놓은 할머니가 파는 물건을 몽땅 사주고 싶었던 적이 있지만, 실제 하나라도 산 일이 기억에 많이 없다. 산동네에 연탄을 날라다 주는 자원봉사자들의 선행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동참하지 못했다.

‘감정노동자’라는 여성 텔레마케터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막상 전화가 오면 받지도 않고 끊거나 끝까지 들어주지도 않고 통화를 서둘러 끝내 버린다.

마음이 성자(聖者)라도 행동하지 않으면 범인(凡人)의 수준에도 못 미침을 안다. 마음만 부처이고 예수인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뜻한 대로 좋은 일을 실천하는 ‘행동하는 양심’들을 우리는 어렵잖게 만난다.

5년 동안 폐지를 팔아 모은 돈 500만원을 강원도 산불 피해자를 돕는데 써달라고 기부한 할머니가 있다. 손수레에 가득 실은 폐지를 팔아야 3000원을 받는다니 2000번 가까이 수레를 끌어 모은 돈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언젠가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는 것 또한 변명임을 잘 알고 있다.

sonsj@seoul.co.kr
2019-06-1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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