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제비꽃의 지혜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제비꽃의 지혜

입력 2019-04-10 22:44
업데이트 2019-04-11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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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삼색제비꽃, 노랑제비꽃, 서울제비꽃, 흰젖제비꽃.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삼색제비꽃, 노랑제비꽃, 서울제비꽃, 흰젖제비꽃.
드라마나 영화를 보다 등장하는 식물에 눈길이 멈출 때가 있다. 주인공이 사는 집의 알로카시아 화분이나 등장인물들이 선물로 주고받는 꽃다발의 새빨간 장미, 버스를 기다리는 장면에 등장하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와 같은 식물들. 이들은 스쳐 지나가는 장면의 일부분일 때도 있지만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등장할 때도 많다. 작년에 보았던 한 일본 드라마에 나온 제비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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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분화로 재배하는 벌레잡이제비꽃. 꽃에서 분비되는 점액으로 곤충을 유인해 잡아먹어 영양분을 충족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분화로 재배하는 벌레잡이제비꽃. 꽃에서 분비되는 점액으로 곤충을 유인해 잡아먹어 영양분을 충족한다.
작년에 ‘언젠가 이 사랑을 떠올리면 분명 울어버릴 것 같아’란 드라마를 우연히 보았다. 외롭고 가난한 젊은이들의 살아가는 성장 스토리인 이 드라마에선 줄곧 제비꽃이 등장했다. 엄마를 잃은 어린 주인공이 새 부모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모래 위에 피어난 제비꽃이 클로즈업되었고, 이삿짐센터에서 주인공이 정신없이 짐을 나르다 잠깐 쉬는 사이 부서진 콘크리트 사이에서 피어난 제비꽃을 보며 미소를 짓고 사진을 찍었다. 러닝타임 내내 제비꽃은 고난의 상황에서 주인공에게 위안을 주는 소재였다.

제비꽃은 늘 그래 왔다. 여느 소설과 시, 노래에 등장해 희망과 위로와 안식을 주는 존재였다. 생각해 보면 이건 아마도 척박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고 생육하는 제비꽃에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누군가 심지 않아도 스스로 번식해 꽃을 피우는 자생식물이다.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해 도시의 길가나 화단뿐만 아니라 시멘트나 콘크리트 갈라진 틈, 인도의 벽돌 사이처럼 도저히 꽃을 피울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하디흔한 제비꽃에 자신을 투영해 힘든 상황을 이겨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자 한다

사실 이들이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는 건 이들의 번식 매개자가 개미이기 때문이다. 제비꽃에는 개미가 좋아하는 엘라이오솜이라는 달콤한 젤리와 같은 물질이 붙어 있어 개미는 제비꽃의 종자를 개미집으로 이동시킨다. 물론 종자를 땅 깊숙이 개미집 안까지 가져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엘라이오솜만 집에 저장하고 종자는 개미집 입구에 버린다. 이 종자가 발아해 자라나 꽃을 피운다.

또 한 가지 재밌는 건 개미들이 먹고 난 모든 음식물 쓰레기를 집 입구에 버리기 때문에 이 쓰레기 양분을 흡수해 종자는 더 잘 발아하고 자랄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흔히들 제비꽃이 피는 곳엔 개미집이 있다고 한다. 흔하디흔한 개미와 제비꽃이 서로를 도와 엄청난 생존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제비꽃은 개미가 지나는 콘크리트나 시멘트 틈 사이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게 된다.

학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제비꽃은 60종 정도로 알려져 있다. 대표종인 제비꽃뿐만 아니라 고깔제비꽃, 서울제비꽃, 흰털제비꽃, 왜제비꽃 등 수없이 많은 보라색의 제비꽃과, 노랑제비꽃이나 흰젓제비꽃처럼 노랗고, 희고, 여러 색이 섞인 다채로운 색의 제비꽃도 있다. 다만 이들은 환경에 따라 형태가 변할 소지가 크다. 햇빛을 얼마나 오랫동안 받는지에 따라 같은 종이라도 꽃이나 잎의 색뿐만 아니라 잎의 형태가 확연히 달라진다. 환경변이가 크다 보니 아무래도 연구가 힘들기는 하지만 이토록 다양한 형태로 변화해 온 것 역시 어떠한 환경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이 작은 식물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우리나라의 잡초를 그리느라 봄 내내 제비꽃을 조사하고 다닌 적이 있다. 나는 어떤 식물을 그리는지에 따라 다른 심정으로 작업에 임하는데, 그렇다고 특산식물이나 희귀식물, 멸종위기식물과 같은 특정식물을 그릴 때에 더 설레고, 잡초를 그릴 때에 마음을 놓는 건 아니다. 오히려 흔하디흔한 식물로부터 더 많은 교훈을 얻기도 한다. 흔하다는 건 그만큼 번식력과 생존력이 강하다는 이야기이고 그들이 긴 역사 동안 번식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제비꽃은 뿌리가 많이 발달해 있다. 겨울을 나고 이듬해 또 꽃을 피우는 다년생이기 때문에 내년 봄 꽃을 피우려면 겨우내 뿌리에 영양분을 많이 갖고 있어야 해 굵고 긴 뿌리를 갖는다. 이들이 긴 꽃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꽃의 수분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제비꽃에 다가오는 곤충 중에는 꽃에 든 꿀주머니만 노리는 곤충도 있고, 수분을 도울 매개 곤충도 있다. 제비꽃의 수분을 돕는 벌만이 혀를 길게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이들만이 꽃 안에 든 꿀을 먹도록 긴 꽃 모양으로 진화한 것이다.

저 먼 유럽 식물원의 화려하고 거대한 식물들보다 작업실 주차장 옆 공터의 작은 식물들이 더 그리울 때가 있다. 차바퀴에 부서진 콘크리트 틈에 핀 작디작은 제비꽃으로부터 나는 자연의 규칙과 질서, 강인한 생명력과 끈기를 배운다.
2019-04-1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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