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의 디지털 미디어] 개인정보 소홀히 하는 사회

[박상현의 디지털 미디어] 개인정보 소홀히 하는 사회

입력 2020-06-10 17:46
업데이트 2020-06-11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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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코드미디어 디렉터
박상현 코드미디어 디렉터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를 시작한 지 몇 개월 지난 후에 있었던 일이다. 지도교수가 내게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자신의 집 전화번호를 갖고 있으라며 프린터로 인쇄해서 작게 잘라 낸 종이조각 하나를 건네줬다. 교수는 그걸 건네주면서 내게 이렇게 말했다. “Don’t lose it(잃어버리지 마).”

나는 그 순간에 그 말이 그 종이조각이라는 ‘물건’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이야기인 줄 알고 의아했다. ‘지도교수는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잃어버리면 다시 물어보면 되는데 무슨 소리지?’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연구실을 나서서 걷다가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교수는 자신의 집 전화번호가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해 달라는 말을 한 거였다. 그러다가 미국 교수들의 명함에는 연구실 전화번호 외에는 다른 번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집 전화번호는 물론이고 휴대전화 번호도 명함에 넣지 않는다.

한국의 문화에서는 명함에 휴대전화 번호가 없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거의 모든 개인정보가 휴대전화 번호를 중심으로 축적되는 사회이기도 하다. 외국인이 한국에 도착해서 휴대전화를 개통하기 전까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그만큼 휴대전화 번호는 중요한 개인정보의 기반인데, 명함에 박아서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뿌리고 다니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회가 한국이다.

하지만 모든 개인정보가 동일하게 함부로 다뤄지는 것은 아니다. 일선 노동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수준은 더욱더 심각하다. 가령 서울 시내 대형 건물의 화장실에 가면 종종 세면대 거울 옆에 ‘화장실 청소 책임자’라는 엽서 크기의 쪽지가 붙어 있다. 거기에는 중년 아주머니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그분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다. 이런 알림판이 대개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문구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그 화장실을 이용하는 일반인들에게 보라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 왜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을까. 화장실이 지저분하거나, 화장지가 없다든가 하는 불편사항이 있을 때 전화를 하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번호는 예외 없이 담당자의 개인 휴대전화 번호다. 그들의 이름과 사진 그리고 전화번호가 노출된 것이다. 아무나 화장실을 이용하다가 기분 나쁘면 언제든지 그분에게 전화해서 화풀이할 수 있게 무방비 상태로 공개한 것이다. 화장실에 전화번호를 두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사용자가 전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면 청소용역회사 혹은 건물관리회사에서 전화를 받아 담당자에게 지시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그 용역회사는 귀찮으니 청소담당자가 직접 받아서 처리하라며 개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공개해 버린 거다.

우리 사회에서 스토킹이 늘어가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고객’들의 갑질에 얼마나 쉽게 노출되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는 용역회사의 무책임한 행동이다. 청소용역만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톨게이트 직원, 버스 운전기사처럼 하루 종일 익명의 다수를 상대하는 노동자들의 이름과 사진을 마구 공개하는 나쁜 관행이 있다. 서비스 품질 향상이라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그 책임을 고용주가 노동자 개인에게 떠넘기는 교묘한 술책일 뿐이다.

지금 한국은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것을 자축하는 분위기지만, 지난 3월까지만 해도 확진자의 주소와 직장명까지 공개했고, 지금도 여전히 성별과 나이, 동선이 공개되고 있다. 확진자가 있었던 위치와 시간 이외에 다른 정보가 굳이 필요 없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많이 공개할수록 좋다는 안이한 발상이고, 개인정보를 소홀히 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결정이다.

세계적으로 한국의 방역은 칭찬을 받지만 동시에 방역을 위해 개인정보를 거침없이 수집, 사용하는 국가로 중국, 한국 그리고 (한국에서 배웠다는) 이스라엘이 항상 언급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독일 같은 나라는 개인정보의 수집, 활용이 방역에 도움이 되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그 국민이 개인정보는 목숨과도 바꿀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못 하는 거다.

개인정보는 우리가 먼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
2020-06-11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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