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풀꽃 편지] 느리게 산다는 것

[나태주 풀꽃 편지] 느리게 산다는 것

입력 2016-11-13 22:54
수정 2016-11-14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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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방송사로부터 프로그램 제작 제안이 왔다. 주제가 느림의 미학이라는 것이다. 왜 내가 느림의 미학의 대상이 되었을까. 이유인즉슨 자동차 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시인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 좋아서 타고 다니는 자전거이다. 자동차 면허증조차 없을뿐더러 자동차 운전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스스로 판단한 지 오래다. 혹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니 환경문제나 지구 살리기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또 오해다. 이산화탄소 줄이기 운동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자전거를 타면 자동차가 못 다니는 길도 갈 수 있는 장점이 있고 걷는 것보다 훨씬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자전거 타기는 내 나름대로 빨리 가기 위한 수단이요 방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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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시인
나태주 시인
이러한 나더러 느림의 미학에 대한 프로그램을 찍자? 약간은 빗나갔다 싶지만 그런대로 응해서 몇 차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러면서 느림의 미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느리게 사는 것은 게으르게 사는 것과는 많이 다른 삶이다. 느리게 산다는 데에는 나름대로 생활철학이 있어야 하고 일관된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세상 흐름에 밀려서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며 사는 삶은 아무리 천천히 살아도 느리게 사는 삶이 아니다. 그것은 쫓기는 삶이고 타인에게 지배된 삶이다. 느리게 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다.

인생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다. 한순간도 자기 자신을 놓지 않고 중심을 지키며 사는 삶이 진정 느리게 사는 삶의 기초다. 아무래도 요즘 세상은 빠르게 돌고 도는 세상이 아닌가. 혼자서만 독야청청 물러서서 있을 수만은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진정 우리가 느리게 사는 삶을 살았다 할 것인가. 평소 내 생각은 이러하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경중과 완급이 있게 마련이다. 무거운 일과 가벼운 일, 급한 일과 느린 일을 말한다. 이것들을 조합해보면 네 가지가 나온다. 첫째는 무겁고 급한 일. 둘째는 무겁고 느린 일. 셋째는 가볍고 급한 일. 넷째는 가볍고 느린 일. 이러한 인생의 조합을 놓고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 지도가 바뀌게 된다.

아무래도 1순위는 첫째 조합인 무겁고 급한 일일 것이다. 2순위는 셋째 조합인 가볍고 급한 일이고, 3순위는 둘째 조합인 무겁고 느린 일이다. 네 번째 조합인 가볍고 느린 일에는 아예 시간을 할애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은 바로 이 4순위의 일에 하루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나 싶다.

오락 삼매경에 빠진다든가 계방에 나가 남들의 얘기로 소일한다든가 시국 얘기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바로 4순위의 일이다. 그것은 낭비적 삶이요 가치 없는 인생이다. 의외로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1순위와 2순위의 일을 서둘러서 처리하고 나서 3순위의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사람들이다. 3순위의 일이란 어떤 것인가? 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일, 내면적 가치를 중시하는 일이다. 종교, 예술, 교양, 인격 도야, 취미활동 등 자아실현에 관한 항목들이다.

그래서 나는 인생 지표를 ‘빨리빨리 천천히’로 잡고 있다. 그것은 꽤나 오래된 일로 40대 이후 줄곧 그랬을 것이다. 빨리빨리 처리할 일은 빨리빨리 처리하고 천천히 할 일은 천천히 하자는 주장이다. 이렇게 살 때 진정으로 느리게 사는 삶이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겠나 싶다.

아무래도 요즘은 디지털 시대다. 아날로그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하지만 나는 이 시대에도 아날로그적 삶은 충분히 필요하다고 본다. 주로 인성에 관한 것, 인간의 내면에 관여하는 것, 감성에 대한 것, 예술작품과 이어진 것들을 디지털로만 해결하기는 곤란하다. 일상생활 가운데 서둘러 처리할 일들은 디지털을 동원해서 처리해야 하겠지만 천천히 해야 할 일들은 아날로그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날마다 이 세상 첫날처럼 맞이하고 날마다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정리하면서 살아야 할 우리들 인생.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절한 조화, 그 사잇길 어디쯤에 진정 우리가 느리게 살아도 좋은 지혜의 현주소가 숨어 있지 않나 싶다.
2016-11-14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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